오늘의 봄을 봄

구십춘광(九十春光)을 꿈꾸었던 이 년 전 이야기

by 그설미

“시한아~”

동생을 부르는 형의 목소리가 세상 다정하다. 집이 아닌 어린이집에서 만나는 동생이 무척 반가운 모양이다. 집에서 동생이 만지는 장난감마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 내 것이라며 손도 못 대게 하던 형이 맞나 싶다. 동생이 신발을 신는 중에도 다가가 안아주고 볼을 비빈다.

아이들은 중앙현관을 나서기 무섭게 나를 보더니 동시에 두 팔을 들어 올리며 한쪽 팔에 하나씩 매달린다. 다섯 살짜리는 말로, 두 살짜리는 눈빛으로 안아달라고 한다. 그동안 몸으로 놀아 준 아빠의 돌봄이 남긴 후유증이다. 할아버지가 달려와 번쩍 안아 든다. 울타리 사철나무의 키를 넘어선 아이들이 신이 나서 엉덩이와 손을 흔든다. 할아버지도 나무처럼 흔들거린다.


아이는 차에 타자마자 친구들이 동생을 보고 싶어 할 거라며 놀이터에 가자고 조른다. 추워서 아무도 없을 거라고 달래도 막무가내다. 할 수 없이 할아버지가 놀이터 앞에 차를 세워줬다. 울상이던 얼굴이 활짝 펴지며 먼저 내리더니 동생에게 손을 내민다. “시한아, 내 손잡고 내려.” 혼자서도 내리기 힘들다며 투정을 부린 게 엊그제인데 오늘은 동생 앞에서 의젓한 형이다. 이제 아빠도 엄마도 일하러 가서 낮에는 자기가 형 노릇을 해야 한다는 걸 아는 걸까.

찬바람이 독차지한 놀이터는 썰렁하다. 친구들이 없으니, 집에 가자고 했더니 다른 놀이터에 있을 거라며 손을 잡아끈다. 연필 놀이터를 지나 세 번째 놀이터까지 둘러보지만,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아이들이 있을 리 없다. 풀이 죽은 아이가 친구들이 숨은 것 같다며 “얘들아, 어디 있니?”라고 목청껏 외친다. 아이의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빈 놀이터 미끄럼틀과 정글짐을 지나 우리에게 다시 돌아왔다.

다음날은 날이 풀렸다. 아파트 놀이터가 아이들 소리로 꽉 찼다. 가벼운 옷차림만큼이나 아이들의 몸놀림도 날래다. 산수유와 홍매의 꽃망울도 눈에 띄게 커졌다. 어제와 다르게 물이 오른 나무가 아이들을 불러낸 걸까. 아니면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에 꽃망울이 부푸는 걸까.

분주하게 뛰어다니던 아이가 손에 쥐고 있던 장난감을 가방에 넣었다. 본격적으로 뛰어놀겠다는 신호다. 곁에 있던 친구의 누나가 “나 잡아봐라.”하며 뛰기 시작한다. 아이를 비롯한 서너 명의 꼬마들이 쪼르르 달려간다. 별거 아닌데도 까르르, 깔깔깔, 꺅, 다양한 방법으로 신나는 걸 표현한다. 이제 두 돌이 채 안 된 아기도 그 틈에 끼어 한몫 거든다. 아장아장 언덕을 오르고 원통형 미끄럼틀을 겁 없이 내려온다.

양지쪽 의자에 앉아 아이를 살피며 한담을 즐기는 엄마들 사이에 낀 할머니는 무료하다. 그때 너른 놀이터를 마다하고 큰 나무 아래 비좁은 언덕에서 열심히 땅을 파는 아이가 보인다. 작은 구덩이에 회양목잎이 수북하다. 뭘 하는지 물어보니 소꿉놀이를 준비 중이란다. 작은 회양목 이파리를 한 잎씩 따서 조그만 손안에 저축하듯 차곡차곡 쌓아 밥을 짓는다. 아이의 행동이 마치 찻잎 따는 어른처럼 공손하다. 아이들로 가득 찬 놀이터가 어제와 달리 살아 숨 쉬는 것 같다.

회양목.jpg


자주 가는 산책길에 아파트 놀이터가 있다. 얼마 전에 지나며 보니 새로 단장하여 놀이공원 못지않은 멋진 곳으로 변해있었다. 그런데 그곳을 지날 때마다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본 적이 없다. 내 산책 시간과 아이들이 모일 시간이 겹치지 않은 것일까. 조용한 놀이터를 가로지르며 드는 생각은 ‘아깝다’였다.


내가 아이 둘을 키울 때 살던 저층아파트는 손바닥만 한 모래 놀이터에 그네 하나와 시소 하나가 전부였다. 그래도 늘 북적였다. 우리 아파트뿐만 아니라 이웃한 빌라며 주택에 사는 아이들이 모두 모였다. 시끌벅적 뛰어놀면 놀이터 바로 앞인 1층 우리 집까지 흙먼지가 날아왔다. 저녁엔 먼지로 보얀 옷을 벗기고 씻기는 게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아이들이 자꾸만 줄어가고 있다. 2022년만 해도 우리나라 평균 출산율이 0.78명이라고 하니 인구절벽이라는 표현이 딱 맞다. 서울에 한 초등학교가 폐교하였고 전국의 초등학교 중 신입생이 없는 학교는 147개교나 된다고 한다. 2050년이 되면 우리나라 인구도 사천만 명대로 줄어들 거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래서 주변에 결혼하고 아기를 낳는 사람을 보면 반갑고 고마운 생각마저 든다.

유치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엄마, 아빠, 동생과 종일 놀았으면 좋겠다던 아이. 이제 종일반이 되어 집보다는 유치원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게 안타까워 태권도라도 보내줄까 물었더니 그건 때려야 하는 거라서 싫지만, 발레는 하고 싶다던 아이. 먹기 싫어도 선생님이 슬퍼해서 먹어야 한다던 고운 심성이 오늘의 봄 같다. 부디 그 마음 잃어버리지 말고 여름처럼 자라 건강하고 단단하게 나이테를 키워갔으면 좋겠다.


2023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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