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도 개 나름
4년 전 담가놓은 개복숭아 청이 꿀처럼 변했다. 그날의 고생과 함께 봉인해 둔 뚜껑을 연 병에서 달콤한 향이 집안에 퍼졌다. 한동안 샐러드 소스를 만들며 매실 청을 사용했는데, 이제부터는 개복숭아 청을 써야겠다. 진액을 다 뱉어낸 과육이 씨앗에 가죽처럼 달라붙어 있다.
개복숭아는 남편 친구가 따줬다. 자신이 운영하는 양평 주말농장에서다. 는개가 바람처럼 날리던 날, 남편이 한달음에 달려가 받아온 개복숭아는 정말 접두사 ‘개’에 어울리는 모양이었다. 크기가 다른 건 괜찮았으나 과육에 붙은 먼지는 설렜던 마음에 찬물을 끼얹었다. 거기다 비 오는 날 땄으니 물기와 이파리가 서로 혼연일체가 되어 손을 대기까지 의지가 필요할 정도였다. 하지만, 비렁에 서 있는 나무를 바라보며 비 맞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매를 땄을 남편 친구를 생각하니 버릴 수도 없었다. 먼저 개복숭아 열매에 욕심을 낸 건 나였다.
깨끗한 것과 솔질이 필요한 것을 나누어 놓고 먼지 묻은 것을 씻어 정리하는 데만 서너 시간은 족히 걸렸다. 상처 나고 먼지가 너무 달라붙은 것도 버리지 못해 따로 모아 칼로 도려내느라 다리가 저리고 허리까지 아팠다. 더구나 개복숭아는 과육에 붙은 잔털 때문에 씻는 횟수도 매실의 몇 배로 늘었다. 그때 애쓴 덕분인지 ‘개’라는 접두어에 어울리지 않게 고급스러운 개복숭아 청이 만들어졌다.
개복숭아의 ‘개’는 과수원의 복숭아와 달리 ‘야생에서 자란, 질이 떨어지는, 흡사하지만 다른’의 뜻이 있다. 비슷한 이름으로 개나리, 개꽃, 개머루가 있다. ‘정도가 심한’으로 쓰이는 접두사 ‘개’로는 개잡놈, 개망나니가 있다. 그중 개망나니는 성질이 아주 못 되거나 예절에 지나치게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옛날 사형수의 목을 베던 사람을 ‘망나니’라고 했다. 아무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겠다. 그래서인지 당시 망나니는 천인이나 중죄인 가운데서 뽑아 강제로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망나니’는 천시의 대상이 되었고 점점 성질이 못된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접두사 ‘개’가 붙으며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헛된, 쓸데없는’ 뜻을 더하는 접두사 ‘개’로는 개꿈, 개수작, 개죽음 등이 있다. 나는 개꿈을 잘 꿨다. 내 꿈이 ‘개꿈’으로 평가절하되기는 했어도 내게는 개꿈이 아닌 적이 많았다. 잠재의식의 시각화가 꿈이라는 거에 기대, 내 생각과 언행을 잘 톺아보는 재미도 있었다. 그러니 내게는 헛되거나 쓸데없는 건 아니었다.
요새는 접두사 ‘개’의 의미가 달라지고 있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개’는 주로 멋지고 좋다는 의미로 쓰인다.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하굣길에 우르르 몰려 탄 학생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개’를 넣어 말한다. “개 멋있어, 개 재밌어, 개 좋아.” 가끔 “개 싫어, 개 재미없어.”라는 말도 들리는 걸 보면 ‘개’는 아주 좋거나, 몹시 나쁘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수십 년 전이지만, 딸이 학교 다닐 때도 친구들 이름 앞에 ‘개’를 붙여 부르곤 했다. 지금 생각건대 그때의 ‘개’는 못하다는 의미의 ‘개’가 아닌 지금의 ‘멋지고 좋다’라는 의미의 ‘개’로 변해가는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아직은 사전에 ‘개’가 못하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으나 조만간 ‘개’의 또 다른 의미로 ‘멋지다로도 쓰인다’고 올라갈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우린 앞뒤 말을 잘 듣고 그 ‘개’의 의미를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거른 개복숭아 청을 보고 있으니, 전자의, 접두사 ‘개’가 아닌 ‘멋지고 좋다’는 후자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제멋대로 생긴 데다 지저분했던 열매의 모습과는 다른 색으로 거듭난 개복숭아 청을 질이 떨어진다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아서다. 이 뿌듯한 결과를 나누고 싶어 가벼운 플라스틱병을 몇 개 사 왔다.
유리처럼 투명한 용기에 청을 담아놓으니, 색깔이 마치 밤꿀 같고 도라지청 같다. 아무래도 이름표를 적어야 할 것 같아 ‘2019년 개복숭아 청’이라는 스티커도 붙였다. 마지막으로 새지 않게 랩으로 씌운 후 마개를 닫았다. 그리고 포장지로 감싸고 끈으로 리본까지 묶으니 그럴듯한 멋진 선물이 만들어졌다. 그 많던 개복숭아 청이 표 나게 줄어들었다. 그래도 뿌듯하다. 개복숭아 청 몇 병 나눌 생각에 기분이 ‘개 좋다’, 아니다. ‘개’도 개 나름이긴 하지만, 이럴 땐 아무래도 기분이 ‘참 좋다’가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