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를 접으며

다시 종이를 접으며, 토닥토닥

by 그설미

선물을 받았다. 노란색 포장지가 토요일 오후처럼 편안하다. 버선코 같은 부드러운 곡선 모양의 구슬 리본이 눈길을 끈다. 시간과 손품을 들인 것이 느껴져 선뜻 포장을 풀 수가 없다. 한참 후 조심스럽게 포장을 풀자 구름 같은 솜 속에 들어있던 선물이 속살을 드러낸다. 그 사람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몇 번 얼굴을 익혔을 뿐인 데다 너울가지 없어 먼저 다가서지 못한 나를 위해 준비한 마음이 보여 속지만큼 얼굴이 붉어진다.


요즈음은 선물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 버렸다. 하지만, 마음을 담은 선물은 여전히 주고받는 서로를 흐뭇하게 한다. 더구나 포장에까지 정성을 다한 것이 느껴질 땐 내용물과 상관없이 연서라도 받은 것처럼 가슴이 설렌다.


나는 작은 선물이라도 포장에 나름대로 정성을 쏟는다. 부피가 작은 것일 땐 주로 색종이를 접어 직접 포장 상자를 만드는데 선물 고르는 일만큼이나 즐거운 일이다. 받을 사람의 분위기에 맞을 것 같은 색종이를 고를 때면 아이처럼 마음이 들뜬다. 그런 다음 필요한 양만큼 꺼내놓고 작은 산을 만들고 긴 골짜기를 내기 시작한다. 물론 선으로 접었다 펴면서 만드는 산과 계곡이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로 가는 길이 된다. 때로는 시작하는 길이 되기도 하고 앞으로 나갈 길이 되기도 하며 누군가에게로 가서 멈추는 길도 된다. 접히고 열리길 반복한 산과 골짜기들을 이어 붙이면 드디어 상자가 완성된다.

20240709_220135.jpg

상자를 접는 동안은 받을 사람만을 생각한다. 그 사람의 얼굴을 생각하고 목소리를 떠올리고 내게 전해진 온기를 느끼기도 한다. 또 종이를 접는 일은 남에게 가는 길도 되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또 다른 내게 이르는 길이 되기도 해서 좋다. 행여 한눈파느라 접혔을 주름진 마음을 펴기도 하고 터트리지 못하고 봉오리 그대로 굳어버린 앙금도 풀어버린다. 접힌 선을 다시 한번 매끈하게 밀 때면 얼굴 근육도 함께 펴는 연습을 한다. 완성된 상자를 보고 있으면 다림질 잘 된 셔츠를 보는 것처럼 내 얼굴도 저절로 밝아진다. 무언가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종이접기는 잠시 한눈팔다 샛길로 빠지면 낭패를 보게 된다.


얼마 전 일이다. 그동안 만들고 남은 자투리 색종이들을 모아 놓은 것을 접다 보니 꽤 많은 양을 접어버렸다. 걸려 온 전화를 받으며 조립하는 데 필요한 개수를 헤아려 놓고 나머지는 상자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좀 더 튼튼한 모양으로 만들 생각에 테이프까지 준비했다. 서로 겹치는 부분에 미리 잘라둔 테이프를 말아 붙이길 반복하며 마지막 장에 이르렀다. 그런데 마지막 장과 첫 장이 서로 맞지 않고 사이가 들떴다. 모양 잡기가 불편해져 온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니 손가락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할 수 없이 다른 것을 먼저 조립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똑같은 과정인데도 이번 것은 탄탄하고 보기 좋게 깔끔한 모양이 나왔다. 밀어둔 것을 다시 가져다 첫 과정부터 살펴봐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도 제 모양은 나오지 않는 미완성품, 결국 휴지통에 넣기 위해 집어 들고 아깝게 버려질 색종이의 개수를 헤아려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뿔싸! 색종이가 아홉 장이다. 여덟 장이어야 모양이 제대로 나오는데 한 개를 더 끼우려고 애를 썼으니 당연히 모양은 나오지 않고 손가락에 힘만 들어가 아팠다.


종이를 접는 일은 이처럼 제 개수에서 벗어나거나 조금이라도 잘못 접으면 모양이 나오지 않는다. 한 장 더 채우면 퍼져버리고 제 선을 벗어나면 틈이 벌어진다. 그래서 종이접기는 사람 사귀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처음부터 잘못 접게 되면 마지막에 가서 제 모양이 나오지 않듯 사람과의 관계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어야만 좋은 관계가 유지된다. 넘치는 개수처럼 혼자서만 정을 많이 줘도 상대를 힘들게 하지만 선을 제대로 접지 않은 것처럼 제 길을 벗어나면 원하는 모양이 나오지 않듯 거리가 멀어진다. 상자를 만드는 일이야 더 끼웠으면 한 장을 빼주면 된다. 선을 무디게 접거나 잘못 접었어도 펴서 다시 제대로 접으면 된다. 그러나 사람과의 사이에서는 관계 회복이 종이 접는 일처럼 쉽지 않다.


주변에 반세기 가까이 이어온 우정이 깨어질까 봐 마음을 졸이는 분이 있다. 힘든 시절들을 공유해 왔던 사이라 친자매 이상이었다는데 그중 한 친구로 인해 많은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우정을 샘내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무엇은 바로 신용이었다. 그 친구는 틀림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한 번 두 번 계속되는 허언으로 접었다 펴기를 반복한 종이처럼 이제는 버려질 일만 남았다고 했다. 그분은 나이가 들면서 틈 없이 날카롭던 시선이 조금씩 무뎌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데 용납할 수 없는 것도 있더라며 몹시 마음 아파했다.


같은 방향을 보고 부족하나마 그 사람의 마음이 되어 이해하고 들어 주려 해도 상대방이 몰라준다면 구겨진 종이처럼 회복 불가능이다. 그분의 친구는 우정이라는 길을 너무 편하게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사람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나는 이왕이면 나쁜 것보다 좋은 이미지만 보려 노력한다. 그래서 가끔 보더라도 따뜻한 미소와 고마운 말 한마디쯤은 마음에 담아둔다.


오늘도 누군가를 위하여 종이를 접기 시작한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선물을 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마음에 품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작은 선물보다 그것을 감싼 상자에 담긴 길고 긴 내 맘을 알아준다면 더없이 감사한 일이다. 설사 그 마음을 놓친다고 하더라도 서운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산을 내고 계곡을 내는 동안 그 사람에게 많이 고마워했으므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은 이렇듯 작은 물건 하나에도 길을 내고 지나간다.

2010년 가을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오늘의 봄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