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갈게, 너를 보러
꼭 그 장소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꽃이라고 믿는 게 몇 가지 있다. 올해는 때를 조금 놓쳤지만, 남편 덕분에 길을 나설 수 있었다. 한 시간씩 달려가서 볼만큼 귀한 꽃이 뭔지 그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예상대로 금괭이눈도 큰괭이밥도 산자고며 얼레지까지 ‘꽃’은 졌다. 하지만, 봄이 왜 봄인가. 병꽃나무에 매달린 꽃송이들, 그 아래로 분홍 앵초와 노란 융단을 편 것 같은 피나물, 외롭지 않게 모여 핀 홀아비바람꽃에 벌깨덩굴까지. 나도 개감채와 큰구슬붕이를 보고는 산삼이라도 만난 듯 반가웠으니, 먼 길 달려간 보상으로는 충분했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 맞은편에서 오는 차를 비키느라 서행하는데 밖을 보니 온통 보랏빛 봄까치 꽃밭이다. 올라갈 때는 맘이 급해 보이지 않았던 풍경이다. 흔하지만 귀한 꽃, 그 이름으로 이 봄을 좀 더 잡아두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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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다. 열어둔 창틈으로 들어온 공기가 어제와는 사뭇 다르다. 훈훈한 기운을 발가락이 먼저 알고 쭉 기지개를 켠다. 소리 없는 울림이 몸 안으로 퍼진다. 겨우내 열지 않았던 쪽문을 밀치니 푸른빛이 와락 안겨든다. 지난겨울 때때로 내린 눈과 낙엽 속에 잠자던 풀들이다.
부지런하기로는 ‘봄까지꽃’이 제일이다. 봄까지는 양지바른 곳이면 어디서나 맨 먼저 보랏빛 꽃잎을 연다. 청보랏빛의 진한 잎맥을 드러내며 무더기로 피어날 때면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봄까지의 향연이다.
해가 저물면 꽃잎들은 시나브로 사라진다. 그러다가 아침 햇살 만나면 다시 제 빛깔을 드러낸다. 다시 피기 시작한 꽃은 어제 진 꽃보다 많아서 점점이 모여 꽃밭으로 변한다. 철쭉 곁에 새 한 마리 손님처럼 날아와 앉으면 그 바람 타고 너울너울 춤까지 춘다.
자세를 한껏 낮춰 그 빛깔과 음악에 흠뻑 빠져든다. 아무리 봐도 또 다른 이름인 ‘큰개불알풀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개의 그것을 본 적이 없으니 꽃 모양을 두고 말할 순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작은 새 한 마리의 날갯짓에 흔들릴 정도의 크기인데 왜 큰개불알풀꽃으로 불렸을까 궁금하다.
그것이 꽃이 진 후 열매의 모양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꽃이 핀 것은 봤어도 열매를 본 적은 없으니 크기조차 가늠할 수 없다. 알아보니 ‘큰’이 붙은 이유는 좀 더 작은 모양의 개불알풀꽃도 있어서다. 불리는 것도 큰개불알풀꽃, 봄까치, 봄까지 등 다양하다. 나 또한 작년 봄까지는 봄까치라 불렀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봄까지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제대로 된 이름이라는 설명을 따라 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봄까치가 더 정겹다.
큰개불알풀꽃의 이름이 바뀐 이유는 해학적이어서 토종식물일 거라 여긴 것과 반대다. 일본 이름을 그대로 해석한 것인데 이름이 점잖지 못하다고 여겨서 달리 불린 이름이 봄까치라고 한다. 봄까지의 국적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던 것이 반가운 손님이 오는 것을 알려주는 까치처럼 맨 먼저 땅 위에서 봄소식을 알리기 때문에 봄까치로 불리다가 본래 이름인 봄까지가 맞는다고 하기까지 이르렀다.
첫 만남이야 봄까치였지만, 봄까지면 어떻고 큰개불알풀꽃이면 어떨까. 반가운 친구 이름 부르듯 흥겹게 부르고 싶으면 봄까치라 하면 될 것이고 조금 점잔 빼고 부를 양이면 봄까지라 하면 될 것이다. 한번 웃고 싶으면 큰개불알풀꽃으로 불러도 좋겠다.
봄까지를 처음 만난 곳은 꽃들엔 대궐이나 다름없을 수목원에서다. 귀부인처럼 화려한 꽃들의 자태를 감상하던 중이었다. 다리가 아파 풀밭 한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았는데, 토끼풀 군락 속에 숨바꼭질하듯 봄까지가 몇 개 피어 있었다.
사실, 봄까지는 전국 어디서나 봄이면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들꽃이다. 어린 시절 내가 자란 들에도 지천이었다. 그땐, 장미나 국화 같은 것만 아름다운 꽃이라고 여겼던 것이 분명하다. 꽃의 아름다운 기준을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에 두었을 나이이다.
살면서 많은 것에 잣대를 세워 아름다움을 평가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해야 할 일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나이가 주는 여유라고 한다면 보고 들은 수많은 것이 스승인 셈이다.
이젠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작은 풀꽃들이 더 아름답다. 봄까지, 봄맞이, 주름잎꽃, 꽃마리, 벼룩이자리. 이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정화된다. 이 봄, 낮은 자리 빛내는 풀꽃들의 아름다운 몸짓에 마음을 뺏긴다. 낮은 곳 빛내는 것이 어디 들꽃뿐일까. 바쁜 걸음 물리고 녀석들의 향연에 관객으로 끼어 앉으면 어느새 내 등에도 날개 하나 돋아나는 것 같다.
2009.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