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 풀어 놓고 간 근심, 송이마다 매달고
어버이날을 일주일 앞두고 친정엘 다녀왔다. 가는 길에 겹벚꽃 안부가 궁금하여 문수사와 개심사엘 들렀다. 문수사 겹벚꽃은 낙화하여 분홍 바다를 이루었고, 사람들은 꽃길을 알록달록 물들이며 지금을 즐겼다. 개심사 벚꽃은 아직 사람보다 빛났다. 보살님이 몇 달 전 개장한 웰빙 산책로 덕분에 관광객이 많이 늘었다고 귀띔하셨다.
종무소를 나오며 건너편 심검당을 바라봤다. 오래전 저녁예불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스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랑방 같았던 곳이다. 그사이 범종각의 위치가 바뀌었고 작은 전(殿)도 생겼으며 겹벚나무들은 더 나이를 먹었다. 그때 수리에 들어갈 거라던 해우소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엄마도 아직은 당신 자리를 잘 지키고 계신다. 외출이 어려운 엄마께 보여드리려고 벚꽃을 몇 장 찍어 서둘러 친정으로 향했다.
해우소 앞에 핀 꽃
어버이날을 며칠 앞두고 개심사엘 다녀왔다. 엄마께는 활짝 피었을 겹벚꽃의 아름다움을 보여드리겠다고 했지만, 그것은 핑계였다. 정작, 가고 싶은 건 나였으므로. 그날은 마음을 제쳐놓고 눈이 먼저 호강했다. 흐드러진 겹벚꽃 뭉치가 산사를 휘감고 있어서다. 범종루와 심검당 부엌으로 이르는 샛길을 지나 해탈문 옆으로 들어섰다. 먼 길 마다치 않고 보러 온다는 청 벚꽃은 명부전 처마 밑까지 파고들어 그 도도한 색이 도드라져 보였다. 상왕산 자락을 휘감고 가는 봄을 한껏 밝히는 겹벚꽃들의 향연이다. 무량수각과 심검당, 대웅보전의 수수함 덕분에 꽃들이 더 빛나는 절이다.
개심사는 초등학교 때 단골 소풍 장소였다. 뒤틀린 고목이 되어버린 벚나무 한 그루 서 있는 자리, 그때는 흙으로 덮인 완만한 둑이었다. 나무 앞에 서서 타임머신 스위치 누르듯 눈을 감고 그 시절로 돌아간다. 친구들은 둑 위로 올라가 늘어진 꽃가지 잡고 사진 찍느라 부산을 떨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이 절의 역사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겠지만, 내게는 화사한 봄 햇살과 분홍 꽃송이, 그리고 먼지 날리던 삼화 목장 길을 걷던 기억뿐이다. 그런데도 이곳을 다녀가기만 하면 친정 나들이에 마침표를 찍는 것처럼 편안해진다.
심검당 옆을 돌아 해우소로 가는 길, 오래된 건물이라 지붕 슬레이트가 낡아서 떨어진 곳이 있다. 어릴 적 고향 집에도 비슷한 건물이 있었다. 대문을 나서면 돼지 우리가 있고 다음은 창고 겸 잿간, 그리고 마지막 칸은 뒷간으로 쓰였다. 회색빛 슬레이트 지붕 뒤로 나란히 서 있던 은행나무 두 그루, 뽑혀가지 않았다면 지금 해우소 곁에 선 나무만큼의 우듬지를 자랑하고 있을 거다. 딱 그만큼의 크기인 이곳 해우소가, 그래서 낯이 익다.
은행나무에 눈길을 주고 있는데 서울 어느 절에서 왔다는 보살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해우소에서 나온다. 근심을 풀어버리고 나오기는커녕 혹 떼려다 하나 더 붙이고 나오는 것 같다. 밑으로 빠질까 봐 칸막이로 세워 놓은 나무를 어찌나 꽉 잡았던지 등에 땀이 다 났다고 한다. 줄 섰던 일행 둘이 한 발씩 뒤로 물러선다. 그 틈에 급했던 내가 먼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선다. 이왕이면 재도 뿌리고 낙엽도 덮어 놓는 여유를 부려보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들어서자마자 후들거리는 두 다리 지탱하느라 좀 전에 부려본 호기는 간 곳 없다. 낡은 발판을 보수하느라 덧댄 판자를 밟을 때마다 바닥이 바닷물처럼 출렁이니 행여 부러지기라도 하면 저 아래 근심덩어리 속으로 처박힐 것은 자명한 일이다.
벌게진 얼굴로 문을 박차듯 밀고 나오니 해우소 앞의 겹벚꽃이 배시시 웃고 있다. 육체가 지녔던 근심 자락 털고 나온 이를 반겨주는 꽃 빛이 그늘 속에서 유난히 맑다. 바람처럼 몰려와 그중 몇몇이 버리고 갔을 근심덩어리들의 풀린 끝처럼. 그 끝자락에 뒷간에서 퍼낸 거름 먹고 피어났던 참깨꽃이 따라 나온다.
어린 시절, 참깨밭에 거름을 나르는 일은 정말 하기 싫은 일 중 하나였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몸에 튈세라 거름통을 조심조심 밭고랑으로 옮겨다 놓았지만, 엄마는 몸이 아닌 참깻잎에 묻지 않도록 조심했다. 조금이라도 잎에 닿으면 타버린다고 했는데 뿌리는 그 거름을 먹고 나서 비 온 뒤 죽순처럼 자랐다. 그러고는 푸른 잎과 줄기 사이 층층이 연분홍 종 같은 꽃들을 매달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아기 피부처럼 보송보송한 솜털 세운 꽃을 피워내는 힘은 거름에 있었다. 그러니 그때 내 몸, 아니 우리 몸에서 나온 더럽다고 여겼던 것들 속엔 아름다운 싹이 숨어있었던 셈이다. 그것들이 흙으로 돌아가면 금덩어리로 변했던 시절엔 사람 것, 가축 것 할 것 없이 용도에 맞게 거름으로 만들어 썼다. 그래서 옛날 농부들은 ‘황금’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지금은 쓸데없는 것들로 인해 속이 답답하여 생긴 근심덩어리라 부른다. 이렇게 뱃속에 쌓인 근심을 버리고 가는 곳을 ‘해우소’라며 처음으로 팻말을 내건 분은 경봉 스님이다. 통도사에서 평생을 보낸 스님은 세속인들이 몸속에 쌓인 근심을 버리고 가는 것 또한 도를 닦는 일이라 여겼다.
나중에 개심사 주지 스님 말씀을 들으니 오래되어 외려 근심을 만드는 이곳이 곧 수리에 들어갈 모양이다. 그래도 본래의 모습은 살려서 정랑보다는 여전히 해우소라는 팻말이 어울리는 뒷간이 되어준다면 좋겠다. 그것은 나를 돌아보는 또 하나의 법당이길 바라는 마음이며 이제는 사라진 우리 집 뒷간의 모습을 여기서나마 볼 수 있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일 수도 있겠다.
해마다 봄이면 개심사에 간다. 작정하고 찾아가지는 않아도 때를 놓쳐 몸이 못 가면 마음으로라도 가는 곳이다. 불심이 깊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어떤 간절한 발원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터앝 자리에 있던 꽃밭과 보물창고 같은 뒤란과 높은 하늘까지도 끌어내리던 맑은 우물을 잃어버린 친정 대신이다. 이곳에서는 애쓰지 않고도 그 시절의 퇴적된 고요를 꺼내 볼 수 있어 좋다.
심검당 부엌문을 밀고 들어서면 삼태기에 고무래로 재 퍼 담는 건강한 엄마를 볼 수 있을 것도 같고, 해우소 앞에 가면 나무 위에서 목청껏 노래 부르다 뒷간으로 빠졌던 벚꽃 닮은 개구쟁이 동생이 앉아 있을 것도 같다. 산사와 속세의 경계가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나 이곳에 와서 만나는 해우소는 그 경계의 언저리에 있는 외나무다리 같다. 그러나 결코 흔들리거나 건너기에 두렵지 않은 다리다. 그것은 봄이 되면 가장 늦게 피면서도 어느 꽃보다 은은한 빛으로 피는 겹벚꽃 덕분이다. 꽃 대궐 같은 경내를 한 바퀴 돌고 내려와 저수지 모퉁이를 돌아설 때면 뭉쳐있던 것들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와 제 자리를 찾아간 듯 비로소 가슴속도 꽃처럼 환해진다.
2010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