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설미 Nov 15. 2024

엄마의 엄마

안받음과 안갚음을 생각하며

  엄마는 세상에 단 한 명이다. 그 엄마에게도 엄마는 한 명뿐이다. 그런데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새로 생기는 엄마도 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있다. ‘없다’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자식에게 베푼 사랑을 늘그막에 받는 엄마 이야기를 보며 든 생각이다. ‘안받음’은 자식이나 새끼에게 베푼 사랑을 말하고 ‘안갚음’은 어미에 대한 은혜를 갚는 일이다. 자식의 안갚음을 안받음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화면 속의 엄마가 마치 말 잘 듣는 아기 같다.

  칠순을 앞둔 엄마에게 3개월 시한부 생이라는 선고가 내려졌다고 한다. 이전에도 두어 번 암을 선고받고 완치했으나 시한부라는 말은 가족에게도 청천벽력 같았겠다. 일정한 시간을 정하고 사망을 에둘러 표현한 ‘시한부’라는 말은 삶이 끝날 날이 얼마 안 남았음을 의미한다. 그런 엄마에게 둘째 아들이 ‘엄마’가 되었다. 

  위로 형과 아래로 여동생까지, 가족들의 노력으로 엄마의 삶은 3개월을 넘어 1년이 되었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할까. 둘째 아들의 모든 일상은 엄마에게 맞춰져 있다. 다니던 직장에 휴직계를 내고 시골에 계신 엄마를 도시에 사는 형 집에 모시고 간병인으로 들어앉으며 아이 아빠 역할은 잠시 접은 듯하다.  

   

  모자(母子)의 일상에 빠져든 건 내 어머니께도 그런 ‘엄마’ 같은 아들이 있어서다. 올해 아흔여덟이 된 어머니는 수년째 막내아들 곁에 머물고 계시다. 따로 살 때도 울산에서 부산까지 이주에 한 번은 내려와 잠을 자며 어머니의 손발이 되어주었던 시동생이다. 딸 같은 아들이라는 말들을 한다. 사실, 딸 같은 아들이라는 말도 틀린 말 같다. 딸이라도 살갑지 않을 수 있고 아들이라고 다 무뚝뚝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시동생은 오 남매 중에 막내다. 남편은 중간인 둘째로, 누이가 둘이 있고 형님이 한 분 계신다. 그런데 모두 시동생만큼 차분하고 살가운 편은 아니다.   

   

  지난해 늦가을에 어머니를 뵈러 울산에 내려갔을 때의 일이다. 시동생이 볼일을 보러 잠시 나가며 남편에게 어머니의 산책을 부탁했다. 남편은 성격이 급한 편이라 차분함과는 거리가 멀다. 난관은 어머니를 휠체어에 앉히는 일부터 나타났다. 환자에게 편한 동선을 고려하지 못하니 어머니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신발을 신기고 등받이를 조절하는 것 등, 익숙지 않으니 더듬댔고 세심하지 못하니 덜컥거렸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공원을 돌고 햇살 좋은 자리에서 해바라기하며 오순도순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런데 공원 한 바퀴 더 돌자는 남편에게 어머니가 이젠 집으로 가자고 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동생이 외출하여 엄마를 챙겨야 했던 형의 모습을 보니 그날의 남편 모습 같았다. 그 엄마는 점심상을 차리는 큰아들이 곰탕에 넣을 파를 성둥 성둥 썰어놓은 거나 반찬을 내놓는 모습에 대놓고 말하지는 않아도 성에 차지 않는다는 걸 표정으로 나타냈다. 그래도 “너랑 먹으니 더 맛있다.”며 큰아들을 배려했다. 그런 긍정의 마음이 그녀가 두 번의 암을 이겨내는 데 큰 힘을 발휘했을 것 같았다. 


  시동생은 밤에도 깊은 잠을 못 잔다. 어머니의 기척이 나면 건넌방에서 달려가 화장실로 부축하고 어머니의 기상 시각에 맞춰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난다. 형수인 내가 가 있을 때도 더 자라며 직접 어머니 아침상을 차린다. 어머니의 세 끼는 아침은 여섯 시, 점심은 열두 시, 저녁은 다섯 시로 정해져 있다. 시동생도 어머니 따라 새벽 여섯 시에 아침을 먹는다. 시동생은 어머니의 반찬을 잘게 잘라주고 흘린 음식물을 닦아내고 아침에 먹는 약을 찾아 드린다. 양치를 마치고 입가에 물기까지 닦아준 뒤 방으로 부축하여 앉히는 등, 어머니를 아기 다루듯 한다. 어머니도 시동생 앞에서는 아기가 되는 것 같다. 

  하루에 한 번씩 하는 목욕도 시동생이 하는 일 중 하나다. 최근에는 수십 년간 복용해 온 수면제를 끊고도 밤잠을 잘 주무신다는데, 아마도 시동생의 그런 노력과, 볕 좋은 날 산책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시동생은 어머니께 아들 아닌 ‘엄마’가 되었다.     


  시동생보다 젊은 그녀의 아들은 엄마를 위해 휴직하고 한창 아빠가 필요할 아이와도 떨어져 지내는 결심을 하기까지 고민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엄마의 그림자가 되어 날마다 산림공원을 오르는 아들은 엄마에게 기댈 수 있는 산 같았다. 그의 엄마가 웃는 걸 보며 좋은 의미의 의존은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날 남편과 산책에 나섰던 어머니는 휠체어를 미는 남편의 손길을 미덥지 않아 했다. 얕은 턱을 넘는데도 겁을 먹고 “살살 밀거래이.”하며 몸을 움츠리던 어머니. 시동생과는 다른 어설픈 손길에 불안해서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오늘은 방송 세 번째 날이다. 생일을 맞은 그녀를 위해 동생들이 찾아왔다. 가족들이 3개월이라는 시한부 생이 1년이 되었듯 내년 생일을 다시 맞기를 바라며 축하하는데 내 콧등이 다 시큰하다. 주변에서 백 수도 무난할 거라는 어머니처럼, 담도암을 선고받은 그녀도 칠순을 가뿐히 넘기길 기원한다. 나도 엄마의 ‘엄마’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아침이다. 오늘은 여느 때와 달리 혼자 계신 친정엄마께 아침 일찍 전화했다. 마음과 달리 건조한 문안 인사지만, 아직은 내가 엄마의 ‘엄마’가 아닌 ‘딸’이라는 걸 확인하는 시간이다. 

작가의 이전글 껌 좀 씹어볼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