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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설미 Nov 14. 2024

껌 좀 씹어볼 시간

너 요즘 하태 핫해

 풍선껌을 한 통 샀다. 꽤 오랜만이다. 풍선껌이 아직도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만큼 잊고 살았나 보다. 겉 포장지를 뜯어내자 껌에서 청포도 향이 났다. 은박포장을 감싼 종이에 ‘너와 함께 있었던 그 향기’라는 메시지가 적혀있다. 초승달 같은 눈썹 아래 적힌 문구를 한참 바라봤다. 껌 풍선의 크기를 서로 재보던 어린 시절 친구의 웃는 얼굴 같았다.

 종이를 펼치니 위에 초성 ‘ㅈ, ㅎ’이 제시되어 있다. 초성을 채워 전달하는 센스 메시지란다. 이런 재미는 놓칠 수 없다. 자음에 맞는 단어를 찾아봤다. ‘잘해’ ‘장화’ ‘주황’에서 막힌 내게 곁에 있던 남편이 “재현도 있고 제환도 있고.” 하더니 빙긋이 웃는다. 요즈음 남편 머릿속에는 오직 손주뿐이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와 손주 이름의 초성이 같다.

 내친김에 풍선껌 하나를 더 꺼내 남편에게 내밀었다. 이번 껌 종이에는 ‘책을 좀 펴놓기라도 하지?’라고 쓰여 있다. 그동안 책을 가까이할 여유가 없었던 사람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초성 ‘ㅈ, ㅁ’이 적혀있다. ‘정말’ ‘주말’ ‘재미’ ‘잠만’ 등 생각나는 단어들을 넣어 문장을 만들었다. “정말, 이번 주말에는 잠만 자지 말고 재미있는 책을 읽어볼까?” 남편은 내 말이 안 들리는지 단물 빠진 풍선껌으로 푸푸, 풍선 만들기에만 열중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방송에서 껌 광고가 사라진 것 같다. 꽤 오래전인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본 건 자일리톨 성분이 함유된 껌 광고가 아니었나 싶다. 충치의 원인이 되는 산을 형성하지 않는 천연 감미료가 들어갔다고 해서 인기가 있었다. 충치 예방을 위해서는 자일리톨 성분이 100%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제품도 있어서 한동안 충치 환자가 증가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일부 제품에 자일리톨 성분과 함께 들어간 설탕 때문이다.

 남편 차에는 자일리톨이라는 글자가 박힌 껌 통이 자동차 부속처럼 붙어 있다. 통이 비면 바로 채워주지만 난 껌을 잘 씹지 않는다. 그런 나도 가방에 항상 추잉 껌 몇 개를 넣어 다닌 적이 있었다. 껌이 들어있는 걸 잊고 지내는 사이 껌은 가방과 한 몸처럼 엉겁이 되어 있기도 했다.


 쥬시후레쉬와 스피아민트, 후레쉬민트는 추잉 껌 삼총사다. 친구 몇 명과 껌딱지처럼 늘 붙어 다니던 때, 함께 껌을 나눠 먹고 도란도란 이야기했던 게 엊그제 일 같다.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런 추억이 있어 가까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때는 그저 껌 반쪽씩 나누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껌 씹을래?” 물으면 너도나도 손을 내밀었다. 취향도 각기 달라 누구의 가방엔 쥬시후레쉬가 다른 친구의 주머니에는 스피아민트가 들어있었다.

 최근에 쥬시후레쉬 껌 디자인이 화장지의 포장지로 바뀌어 나온 걸 봤다. 콜라보는 화장지만이 아니라 쥬시후레쉬 이름을 붙인 아이스크림과 맥주, 에이드도 나왔다고 한다. 아이스크림과 맥주에서 나는 껌 맛은 별로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하다. 노란색 쥬시후레쉬는 한동안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올 때면 서비스로 줬던 껌이다. 지금은 식후 커피가 공식이지만 그때는 껌이 그랬다.


 껌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건 한국전쟁 무렵, 연합군에 의해서 전파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릴 때 집 앞 신작로를 걷고 있으면 트럭을 타고 이동하던 미군이 사탕이며 껌을 던져줬던 게 생각난다. 온몸을 뒤덮었던 부연 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내 발등에 떨어진 껌과 사탕을 바로 줍지 못했다. 그 자리엔 나뿐이었으니 어차피 내 거라는 생각보다는 군인들이 무서워 눈앞에서 사라지길 기다렸던 것 같다. 그래도 그 껌을 집에 가져가 단물 빠지도록 씹고 벽에 붙여놓았다가 다시 씹었다.


 껌을 씹으며 얻는 의외의 효과가 실린 신문 기사를 읽었다. 단, 이라는 조건이 붙기는 한다. 기사에 의하면 껌을 씹으면 열량 섭취량이 줄어든다고 한다. 운동할 때 껌을 씹으면 운동 효과를 높일 수 있으며, 집중력을 높이는 것을 확인한 연구는 여러 차례 입증이 되었다는 기사다.

 눈이 번쩍 떠지는 건, 껌 씹기가 면역력을 증진할 수도 있다는 일본 준텐도대의 연구 결과다. 껌을 씹으면 침 속에 면역글로불린A가 증가하는데 이는 세균이나 바이러스 등 다양한 병원균에 대항하고 방어하는 역할을 한다니 이젠 껌 좀 씹어야겠다. 하지만 무엇이든 과하면 탈이 나는 법이다. 30분 이상 씹으면 턱관절에 무리가 가고 사각턱이 될 수 있으니 무설탕 껌으로 하루 10분 정도라는 단서가 붙는다.


 지난번에 산 풍선껌이 아직 두 개나 남았다. 가방을 여니 포도 향이 구석구석 다 스며있다. 며칠 전 ‘너와 있었던 그 향기’가 말이다. 오늘 꺼낸 종이에는 ‘너 요즘 하태핫해’라고 적혀 있다. 뇌 기능을 활성화하고 정신을 이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는 껌 씹기의 효과에 어울리는 문구다. 또 코로나19로 쓰기 시작했던 마스크에서 곧 해방될 모양이니 그동안 판매량이 줄었다는 껌이 다시 ‘핫해’ 질 전성시대가 오리라는 걸 알리는 것도 같다.

 이번 초성은 ‘ㅈ, ㅇ’이다. “좋아, 이제 껌 좀 씹어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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