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헤어지는 것과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것의 차이
지인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오랫동안 병원을 집처럼 여겼던 분이다. 더구나 최근엔 아무도 못 알아보고 그저 연명치료만 하고 있다고 했다. 한 번도 뵌 적은 없으나 부고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신 분도 남은 가족도 홀가분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도 숙제를 마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해야겠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해왔다. 그때는 등록처가 전국에 몇 군데 없었다. 수도권에 살면서 서울이 멀다는 핑계로 미뤘는데 요즈음엔 보건소나 병원에서도 등록할 수 있는데도 차일피일 미뤘다. 그러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날을 잡았다. 아마, 주된 대화가 모든 생물학적 기능이 중지는 되는 ‘죽음’이어서였을 거다. 전철역에 내려서 등록기관인 보건소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다. 그 짧은 거리를 가는 데 참 오래도 걸렸다. 걸어가는 동안 여러 생각이 우산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게 뭐라고, 도착하니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만약에 내가 의사 표현을 하지 못할 때, 연명치료가 의미 없을 때를 위한 대비라지만, 생명을 담보로 한 문제이니 긴 설명을 들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등록신청서에 서명했다. 마치고 나니 혹시 모를 일에 보험이라도 들어둔 것처럼 마음이 든든하다. 수년간 풀지 못한 과제를 마친 느낌이다. 보건소 문을 나서니 들어갈 때까지도 우산을 썼는데 어느새 비가 멈췄다. 오랜만에 보는 오후의 햇살이 눈부시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한 장의 서류에 서명했을 뿐인데, 늘 다니던 길이 낯설게 보인다.
이제 죽음은 금기의 단어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생명을 중단하는 방법은 조력사와 적극적 안락사, 소극적 안락사가 있다. 조력사는 치료가 의미 없을 때 스스로 약물이나 주사를 주입해 생을 마감하는 일이다. 적극적 안락사는 의사가 약물을 투여하는 것이고 소극적 안락사는 말 그대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일이다. 그러니 내가 서명한 연명치료 의향서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소극적 안락사에 들어가겠다. 2018년 연명의료결정법이 만들어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2016년 8월 국회에서, 회생 가능성이 없으며 증상이 악화하여 죽음이 임박했고 치료해도 회복이 되지 않는 임종 과정을 위한 웰다잉법(존엄사법)이 통과되었다. 바로 연명의료결정법이다. 말 그대로 의식이 없는 상황에서 심폐소생술,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혈액투석 등으로 연명하는 것을 멈추는 데 동의하는 일이다.
최근 남호주에서 자발적 안락사를 허용했다는 기사를 봤다. 7주 만에 30명 넘게 신청했다는데, 누구나 가능한 건 아니다. 18세 이상의 성인이어야 하고 호주 시민권자나 영주권자이면서 남호주에서 최소한 12개월 이상 거주한 사람이어야 한다. 또 두 명 이상의 독립적 의료전문가로부터 환자의 상태가 치료 불가능하며 질병이 계속 진행되고 기대 수명이 일 년 미만이라는 판단을 받아야 한다. 생명에 관한 거니 환자가 독립적으로 안락사를 결정할 능력과 이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것도 증명해야 한다.
몇 년 전, 한 작가가 자신의 독자였던 사람의 조력사 현장에 함께 한 이야기를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호주 교민으로 스위스에서 조력사를 선택한 그는 60대의 폐암 말기 환자였다. 고통 없이 가고 싶었던 그는 가족들과의 만찬으로 생전 장례식을 치렀다. 작가는 그날 떠난 사람의 아내로부터 조력사는 본인한테만 품위 있는 죽음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생각이 많아진다. 유명 배우 알랭 들롱도 조력사를 선택했었다. 선택은 선택일 뿐, 그는 건강 악화로 사망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집을 향하여 걸어가는데 메시지가 도착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시스템에 등록되었으며 한 달 이내 등록증을 우편으로 받아볼 수 있다는 내용이다. 혹시, 내가 의식이 없을 때, 내 생명 연장을 가족이 결정해야 하는 일만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연명의료를 결정해야 할 순간 없이 편안하게 간다면 더없이 좋겠으나 어쩌다가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인생의 마지막 순간만은 정신이 또렷할 때 내가 결정하고 싶었다.
한 달 후, 등록증이 도착하면 가족과 정보를 공유하고 남편에게도 권해야겠다. 《모두 웃는 장례식》이라는 동화책에 ‘스스로 헤어지는 건 작별이고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건 이별’이란 말이 있었다. 그러니 오늘 내 결정은 만약에 뜻밖의 일이 생겼을 때, 갑작스럽고 힘든 이별이 되지 않도록 준비하는 작별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