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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설미 3시간전

바람

바람(希望)으로 바람(風) 잠재우기

  벌레 한 마리가 어깨에서 팔꿈치 쪽으로 기어가는 게 보였다. 기겁하여 소리를 질렀다. 정신없이 손바닥으로 팔을 훑어내렸는데, 다행히 꿈이었다. 내 목소리에 놀라 깨고 보니 새벽 세 시다. 무의식에서 건너온 의식의 세계가 낯설다. 꿈이 생생하여 불을 켜고 주변을 살펴보고서야 다시 누웠다. 잠의 꼬리를 붙잡고 매달려 보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잠이 도망가며 툭 던져두고 간 게 있으니 바로 이명이다. 형체 없는 손님은 무람하기 이를 데 없다.      

  잠이 달아난 자리를 바람이 차지했다. 살랑거리는 봄바람도 아니고 시원한 바닷바람도 아니며 마음을 설레게 하는 바람은 더더욱 아니다. 바람은 세기를 달리해 촉각을 곤두세우게 만든다. 파도처럼 잔잔했다가 요란했다가 회오리를 일으키기도 한다. 

  주인 허락 없이 들어온 바람이지만 예의는 있어서 한쪽 귀만 차지하고 앉았다. 그래도 자꾸 신경이 쓰여 바람 소리를 덮어볼 요량으로 음악을 틀었다. 하지만, 노래가 멈추자 다시 바람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 바람의 근원을 헤아리다가 한겨울 소백산 비로봉을 떠올렸다. 

  그해 소백산에는 세상 모든 바람이 모여든 것 같았다. 숲속 오솔길을 걸을 때 부는 실바람은 하나도 춥지 않았다. 이정표 같은 마른 주목 앞에서 맞는 겨울바람은 시원하기까지 하여 산들바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비로봉에 부는 바람은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옷깃을 한껏 여미고 얼굴을 가려도 바람은 빈틈을 잘도 파고들었다. 도망치듯 산 아래로 내려와서야 칼바람에 난도질당한 정신을 겨우 수습할 수 있었다. 

  여민 옷을 파고들던 바람처럼, 내 안 어딘가에 빈틈이 생겨서 바람이 들어온 걸까. 세상 고요한 왼쪽과 바람에 잠식당한 오른쪽 세상의 경계에 서면 눈까지 어지러워 심란해졌다. 어릴 적 들었던, 전봇대에서 울리는 소리로 느껴질 때 고개를 왼쪽으로 한껏 숙이고 한의원을 찾았다. 

  아플 때마다 찾다 보니 한의사는 내게 온 손님의 이력을 다 꿰고 있다. 어깨부터 소화기 문제, 전정기관신경염에 뇌동맥류까지. 그뿐인가 갑자기 아팠던 종아리며 넘어져 다친 무릎치료에 손가락 관절까지, 나열하기 창피할 정도다. 그래도 몸에 문제가 생기면 선생님을 찾는다. 하다 하다 이제 병명에 이명까지 올리게 생겼다.     

 귀에서 소리가 난다고 하니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했다.

 “먹는 양은 적은데 몸을 너무 쓰니 그런 거야.”

 가서 보약이라도 한 재 지으라며 등 떠미는 가족의 말을 달고 갔으나 약 먹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의사도 어지러움이 온 다음 회복 속도나 강도가 작년보다 나아 보이니 좀 더 기다려보자고 했다. 새로 생긴 이명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불편하기는 해도 괜찮을 거라는 말 한마디에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그런데 귀 주위에 침을 맞고 온 다음 날, 누에가 뽕잎 갉아 먹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오직 내 귀에서만 나오고 내 귀로만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어느 순간 세찬 소나기로 바뀌었다. 그러다 태풍이 되어 귓속을 휘저었다. ‘내 귀에 캔디’가 아닌 ‘내 귀에 바람’을 잠재우려 부러 텔레비전 소리도 키우고 밖으로 나가봤지만 소용없었다. 겨우 면봉 하나 지나갈 만한 좁은 길에 부는 바람이 이렇게 크게 들릴 수 있다니. 바람도 무게가 있는지 자꾸만 머리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 

  온갖 소리는 손님처럼 이틀을 머물다가 월요일이 되자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귀를 기울이고 신경을 모으면 들릴 정도가 되니 모든 게 달라 보였다. 먼 데서 들리는 것 같았던 소리도 잘 들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가벼워지니 몸도 가뿐한 게 날개라도 달린 것 같았다. 


 그날, 내 귀에서 떠난 바람(風) 자리에 얼른 새로운 바람 몇 개를 들어 앉혔다. 세 번째 스물을 채운 바구니에 소소한 희망 몇 개가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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