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라리만 제이 Sep 14. 2020

Connecting the dots...

인생의 점들을 연결하여 스스로 운명을 만들다


“The world believes, “Success makes you happy.” The truth is; happiness makes you successful."

세상은 성공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말하지만, 실은 행복이 성공을 가져다준다. (앤드류 매튜스, 호주 작가)



나는 일본 5대 종합상사 중 한 회사에 근무 중인 종합상사맨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냥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그렇게 많은 돈을 예금으로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십 대 중반에 "영혼까지 끌어 모아서 무조건 사야 한다"는 집도 한채 없다. 임원으로 출세한 것도 아니다. 정말 그냥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하지만, 나는 내 관점에서 현재까지는 성공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일에 보람을 느끼며, 내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내 인생에도 앞으로 여러 번의 고난이 반드시 찾아오리란 것을 경험상 알고 있다. 하지만, 지난 46년간의 삶을 바탕으로 나는 지금의 행복을 유지하고 더 키워 나갈 수 있다는 자신이 있고, 설령 지독한 고난이 찾아와도 가족과 함께 멋지게 헤쳐 나 갈 수 있다는 신념도 있다.


나는 지금 현모양처인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너무~ 너무~ 예쁜 딸과 함께 머나먼 인도네시아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무엇보다 외국인인 나를 믿고, 해외 주재원으로 큰 임무를 맡겨 준 우리 회사에 감사하고, 매일매일 치열하게 일하고 가끔은 의견 충돌도 있지만 가족처럼 지내는 동료 주재원들, 현장에서 고생한다고 지원사격을 아낌없이 해주는 동경 본사 동료들, 비즈니스 관계를 넘어 친구처럼 따뜻하게 마음을 열어주는 비즈니스 파트너들, 그리고 내가 담당하고 있는 사업회사에서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일 해 주고 있는 모든 인도네시아인 직원들, 아침부터 밤까지 군말 없이 내 발이 되어주는 운전수 Dani...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나의 편이 되어주는 아내와 존재 그 자체만으로 나에게는 너무나 큰 축복인 나의 딸...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나를 낳아주고 인도해 준 어머니... 나의 하나뿐인 어머니에게 감사하며 지낸다.




하지만, 내 인생이 쭉 이렇게 감사하면서 행복한 매일매일로 채워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프롤로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고뇌하는 그대에게"에서 이야기 한 내 인생 1 쿼터(만 스무 살 까지) 까지는 "나는 왜 이런 집에 태어났을까?" "왜 나만 이렇게 고생해야 하는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 소용없다." "난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놈이야."라고 세상을 원망하고, 그냥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면서 그냥 그렇게 살자라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어머님이 이 글 보면 섭섭해하실 텐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봐도, 내 인생 1 쿼터에서는, 미래의 내가 매일 4개 국어를 사용하면서 여러 나라를 날아다니며 수많은 사람들과 비즈니스를 하는 종합상사맨이 될 거라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애플의 창시자 스티브 잡스 (Steve Jobs)가 2005년 스탠버드 대학 졸업식에서 한 연설은 이미 "연설의 클래식"이 됐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미 비디오나 서면으로 그의 연설을 접했으리라 생각한다. 혹시, 아직 못 보신 분이 있다면, 당장 유튜브에 "스티브 잡스 스탠퍼드 연설"이라고 검색해 보라. 한글 자막이 달린 수많은 영상들이 나올 것이다. 분명 많은 것을 느끼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의 위트 있지만, 인생철학이 담긴 많은 명문 중에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말이 있다. 사람들 마다 해석은 조금씩 다르지만 내 해석을 이렇다.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미래를 향해 인생의 점들을 이어 갈 수는 없다. 오직 지나 온 날들의 점들을 이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지금의 점들이 언젠가 미래에 이어질 것을 믿어야 한다. 그것이 베짱이든, 운명이든, 인생이든, 인연이든 뭐든 믿어야 한다.



출처: Pixabay


부산에서 태어나 대구 촌놈으로 자란 내가, 자카르타에서 여러 사업회사의 경영을 책임지는 종합상사맨이 되기까지, 결국 그때그때 배짱만 믿고 저지른 일, 그리고 생각지 못한 작은 인연들을 그냥 넘기지 않고 인생의 전환점으로 활용하면서, 내 인생의 길에 뿌려진 수많은 점 들을, 선으로 면으로 이어 온 것이 운명처럼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준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면, 앞으로도 내 인생의 길 위에 무수히 떨어질 점들을 어떻게 이어서 내가 원하는 운명을 스스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을 항상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고,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일상이나 작은 인연에도 그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내가 마지막으로 자소서나 이력서를 쓴 것은, 정확히 10년 전인 2010년에 현재의 회사에 입사 지원할 때다. 입사 후 10년간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예전의 나날들을 뒤돌아 볼 여유가 없었다. 브런치 작가 신청 후, "작가 이력, 포트폴리오"에 10여 년 전의 이력서에 쓴 내용들을 일부 적으면서,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던 친구와 재회라도 하듯, 과거의 나와 다시 만나는 느낌이 들었다.

대략 나의 지나 온 "인생의 점들"은 이렇다.


1974년 부산 태생, 대구에서 성장

대구 덕원고등학교 졸업

영남대학교 공업화학과 중퇴

경북대학교 무역학과 입학

English Speech Contest 10 여 차례 입상

무주 전주 동계유니버시아드 영어 통역 (대회위원회 전액 지원)

Georgetown University, 영어연수 (3개월)

주미 한국대사관 인턴 근무 (3개월)

한일 정부간 청소년 교류단으로 일본 주요 도시 방문 (일본 정부 전액 지원)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삼성 애니콜 리포터 (삼성전자 전액 지원)

일본 히로시마 대학 교환학생 (일본 JASSO 전액 장학금)

경북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로레알 코리아 (6개월) 구매 담당

LG 전자 (2년) DVD 플레이어 일본 영업

LG Display (4년) 휴대폰 디스플레이 일본 영업

일본 히토츠바시대학 경영 석사 (MBA, 일본 문부성 전액 장학금)

미쯔이물산 인턴 (3개월)

스미토모 상사 (입사 10년 차, 현재 자카르타에서 주재원으로 근무 중)


나이가 드니, 20년 이상 지난 일들은 정확히 그게 몇 년이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그리고, 뭐 중요한 것도 아니니, 일단 연도는 생략했다. 아마도 위에 나열한 내 "인생의 점들"을 읽으신 분들이 유독 궁금하게 여기는 표현이 있을 것 같다.


"전액 지원"...

"전액 장학금"...


그렇다. 나는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은 엄청 많았는데,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남의 돈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 하자"를 모토로 "상금 헌터"처럼 대학시절을 보냈다. 내가 자비 혹은 우리 어머니 돈으로 쌓은 경력 (혹은 스펙) 은 대학 학비와 미국에서의 3달간의 어학연수 밖에 없다.

 

영남대학 시절은 학자금을 융자로 지불하고 나중에 내가 값았다. 경북대학 시절은 국립대라 당시 4학년 2학기까지 한 학기 수업료가 100만 원 이하였던 기억이 있다. 4년간 약 800 만원 (같은 학교를 다니던 여동생이 그 흔한 국립대 장학금 한번 못 받는 나를 “장학금 4년 면제생” 이라고 놀렸다), 지금의 나에게는 그렇게 큰돈도 아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IMF 전후로 고생하신 어머님께는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금액이었다.


떡볶이 한 접시가 50원 하던 시절, "엄마 100원만..." 하던 때는 있었지만, 철든 후로는 고생하는 어머님께 용돈 받는 게 너무 미안했던지, 돈 달라고 한 기억이 거의 없다. 대학에 입학한 후로는 어떻게든 내가 벌어서 사용했다. 없으면 없는 대로 그냥 그렇게 지냈다. 장애인인 어머님이 불편한 몸으로 악착같이 버신 돈을 달라고 손 내밀기도 죄송했지만, 1994년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바로 새집을 지었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IMF 경제 한파가 몰아쳐, 은행융자를 갚기에도 너무 몸고생, 마음고생이 많으셨던 어머니를 차마 더 이상 힘들게 할 수는 없었다.


정말 별의별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다. 인터넷 카페의 점원, 당구장 청소, 술집 전단지 돌리기, 아는 형님 집 일일 파출부, 중고등 학생 과외...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 남는 건, 가족에게는 여행 간다고 하고는, "절친" 민석이랑 함께 한 부산에서의 지하철역 공사현장 잡부일 (일명 노가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공항역 건설현장이었던 것 같다. 1주일간 현장에서 숙식하며, 공사현장에서 잡일을 했다. 하루는 물이 고인 땅에 박힌 바위를 드릴로 깨는 작업을 했는데, 감전이 되어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지금 생각해도 내 인생에서 죽음에 가장 근접했던 아찔 한 순간이었다. (이건 아직 우리 가족들 모르는 이야기인데...)

인터넷 카페 알바시절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고, 편한 아르바이트가 영어 웅변대회 (English Speech Contest)였다. 당시 여러 대학의 영문과, 영자신문사, 사설 영어학원이 개최하는 웅변대회가 많았는데, 입상하면 상금으로 20~30만 원, 혹은 부상으로 컴퓨터, 당시에는 엄청 귀했던 휴대폰, 웬만한 종합 선물 세트 박스보다 더 큰 영영사전 등을 받았었다 (한 번도 안 본 영영사전은 아직 대구 집에 있다). 한 달 내내 과외를 해도 30만 원 받기가 힘든 시절에, 운이 좋으면 몇 시간 만에 20~30만 원 버는, 이른바 일확천금의 아르바이트였다. A4 기준으로 3장 정도였나? 5분 정도 영어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만 하면, 돈을 주는 것이다. 이게 웬 떡이여~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남 앞에서,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하는 것을 즐기는 타입이라는 것도... 그 후로, 민석이랑 동현이라는 친구와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 안무를 연습해 "금남의 학과"인 가정학과 페스티벌에 초대받아 춤도 추고, 교내 가요제에서 당시 이 인기 있던 "더 블루"의 "너만을 느끼며"를 민석이와 함께 불러 인기상도 받았었다 (민석이가 김민종, 나는 손지창). 솔로로 교내 가요제에 나갔을 때는 K2의 “유리의 성”을 불렀다. 거짓말 같지만, 그때는 그 미친 고음이 올라갔었다. 암튼, 다시 그때로 돌아가서 놀라고 해도, 더 잘 놀 자신이 없을 만큼 정말 신나게 놀았다. (아~ 옛날이여~)   

영어회화 서클 MT에서 하여가를... 아구 촌시러... 왼쪽이 양군 역의 절친 민석이... 중앙이 주노 역의 나...


잠시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는데... 아무튼, 당시는 인터넷이 일반화된 시절도 아니라, 영어 웅변대회의 공지는 보통 영문학과 같은 인문학부 게시판에 종이로 게시되었고, 내가 다니던 공대나 상경대에는 게시물이 없었다. 주최 측이 아마 참가자가 가장 많을 것이라 예상되는 인문계 학과에만 참가 안내서를 보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난 주기적으로 자전거를 타고, 각 학과 게시판을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방학 때 수업이 없어도, 한 번씩 전교 게시판을 쭉 돌아보는 게 습관이었다. 그러면서, 영어 웅변대회뿐만 아니라, 저 위에 나열한 점들이 내가 무심코 지나쳐 온 인생의 길가에 널려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무주 전주 동계 유니버시아드 자원봉사 모집, 한일 정부 간 청소년 교류단 모집, 일본 자매 학교 교환학생 공고, 등등의 기회도 결국 타 학과 게시판에서 주운 점들이다. (2000 시드니 올림픽 삼성 애니콜 리포터는 신문에서 보고 지원한 것 같다.)


스키라는 걸 한번 타 보고 싶었다... 그런데 돈이 없었다... 때마침 재미있는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무주 전주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자원봉사자를 뽑는다는 것이다. 스키장에서 생활하는 것이니, 설마 한 번쯤은 스키를 탈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영어 통역으로 지원해, 전주에서 면접을 봤다. 태어나서 처음 가 본 전라도... 본토 "전주비빔밥"을 먹고 대구로 돌아와 기다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합격했다는 연락이 왔다. 지금 당시 기사를 검색해 보니, 경쟁률이 5.6:1 이였다고 한다. 역시 "운칠기삼"이다.

자원봉사자 ID... 저 하트 스티커는 누가 붙였더라?

대회 준비기간과 대회 폐막후 정리기간을 합해, 한 달 가까이 무주리조트에서 생활했던 것 같다. 설마 한 번쯤은 스키를 탈 기회가 있겠지라고 생각한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매일이 공짜였다... ㅋㅋㅋ

저녁까지 근무하면, 야간스키는 공짜였던 것이다. 처음 타 보는 스키의 짜릿함... 매일 밤 엉덩이가 방탱이가 되고, 온몸에 멍이 들어도 너무 재미있어서 밤마다 좀비처럼 스키 리프트로 향했다.


그런데, 여기서 내 인생이 처음으로 일본과 엮이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일본 선수단에서 근무하시던 재일교포 한분이, 일본어 통역분들 중에는 나이 많은 할머니들이 너무 많아서 사실상 일손이 딸린다는 하소연을 대회 위원회 사무실에서 하시는 걸 우연히 옆에서 듣게 되었다.


나: "제가 가서 도와 드리면 안 될까요? 일본어는 못하지만, 뭐든 시키는 대로 할게요."


졸지에 영어 통역이 일본 선수단으로 배정됐다. 그때 내가 왜 나섰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만, 그 일을 계기로 일본 선수단 분들과 한 달 가까이 같이 지냈다. 일본 선수단장 분이 영어를 잘하셔서 그분 비서처럼 일했는데, 그 분과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면서,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고, 언젠가 일본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개회식장에서... 눈은 왜 감아서리...


일본에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또 돈이 없다... 때마침 재미있는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한일 정부간 청소년 교류단으로 방일할 대학생들을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약 2주간, 일본 대학생과의 간담회, 일본 정부기관 방문, 산업현장 방문, 홈스테이, 문화체험 등의 일정으로 이루어진 대학생 파견 단원을 모집 중이었다. 운 좋게 여기서도 방일 교류단의 일원으로 선발되었다.


일본이라는 나라에 처음으로 발을 내 디딘 순간이었다. 90년대 후반만 해도 아직은 한국보다 훨씬 발전해 있었던 동경의 풍경에 많이 놀랐던 기억이 남아 있다. 2주간, 동경, 오사카, 코베, 키타큐슈, 카나자와 등 주요 도시를 돌며, 많은 경험을 했다. 그중에도 코베항의 야경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카나자와에서 홈스테이를 했는데, 따뜻하게 우리를 맞아준 홈스테이 가족들에게 후에 감사편지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죄송하기도 하고 후회되어, 몇 년 전에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 관련 부처에 각각 당시 내가 홈스테이 했던 가정에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문의했으나,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그분들 연락처를 알 수가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 일로, 신세 진 분들에게는 감사하다는 말을, 죄송하게 느끼는 분들께는 죄송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때 반드시 전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 죄송하다고 직접 말하지 못하는 것도 25년이 넘는 나의 한이다.


한일 정부 간 청소년 교류단으로 처음으로 간 일본... 20세기 말에 유행하던 청청 패션을 입고 온갖 똥폼을... 저 운동화는 무주 일본 선수단이 선물로 준 선수단 운동화..


대학시절 마지막으로 나를 흥분시킨 공지가 떴다. 4학년 때 학교 본관 게시판에 공지된 일본 자매 대학으로 보낼 교환학생 모집 공지였다. 그것도 우리 학교가 처음으로 실시한 교환학생 1기였다.

상금으로 20~30 만원 받던 영어웅변대회 와는 차원이 다른 "대박 공짜 기회"였다. 일본 최고의 명문대학인 교토대학과 히로시마 대학에 각각 2명씩 교환학생을 파견한다는 공지였다. 선발 방식은 학점평가와 자체 영어시험 (수업이 다 영어라), 그리고 면접이었다. 파견되면, 학비는 경북대학교에 그대로 내고, 일본 JASSO (일본 학생 지원기구) 장학금으로 생활비 8만 엔 (10만 엔이었나? 가물가물....)을 매달 받는다는 조건이었다. 히로시마 대학 기숙사비가 월 6천엔 (한화 약 6만원) 이었으니, 1년 후 돌아올 때는 꽤 많은 엔화를 들고 올 수 있었다. 외화 획득에 조그마한 기여를 한 것이다...


1, 2 등은 교토대학, 3, 4등은 히로시마 대학에 배정되는 조건도 있었다. 학점평가와 영어시험을 마치고 히로시마 대학에 갈 의향이 있으면 면접을 보러 오라 해서 면접 보러 갔다.      


면접관님: "학생은 이제 4학년 되는데, 취업준비는 안 하고, 교환학생 갈 수 있니?"

나: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2년 늦었는데, 한 해 더 늦어도 상관없어요. 꼭 가고 싶습니다! 보내주세요!"

라고 대답했다. 면접관님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시길래 안 될 줄 알았다... 그런데, 희한하게 붙었다.

세상만사 "운칠기삼"인 것이다.


부랴부랴 대학 내에 있는 어학당의 일본어 초급강좌를 등록했다.


"코레와 펜 데스~"


내 인생이 본격적으로 일본과 엮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히로시마 유학시절, 미야지마에서...


주미 한국대사관에서의 인턴, 시드니 애니콜 리포터, 히로시마 대학시절 에피소드, MBA를 위해 두 번째 일본 유학을 가게 된 이야기는 다음에 자세히 하도록 하겠다. 여기까지 쓰는 나도 힘들고, 읽으시는 분들도 질릴 것 같아서...


아무튼, 대학시절 이래 저래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경험을, 내 돈이 없어서 남의 돈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다녔고, 운 좋게 하나둘씩 했을 뿐인데, 그게 나 나름의 독특한 경력이 되고,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해 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다음 점, 그리고 그다음 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는 건, 잡스 형님 말마따나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야 깨달았다. 그리고,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할 생각이지만, 저 보이는 굵은 점들과 점들 사이에도 무수히 작은 보이지 않는 점들이 "인연"과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게시판에 글로 쓰인 보이는 점을 줍는 것보다, 한 순간의 대화로 쓱~ 스쳐 지나가는 보이지 않는 점들을 주워서 엮어 가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우연한 인연과 운명이 오히려 인생에 있어서의 파급력은 훨씬 컸었다는 것을 느낀다.


여러분은 지나 온 세월 속에 어떤 보이는 점들과 보이지 않는 점들을 이어 왔는가? 그리고, 그 점들을 이어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 왔는가? 아니면, 뒤돌아 생각해 보니 중요한 점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쳐 와서 후회하는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도 없고, 후회해 봐도 소용없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 많은 점들이 우리들을 기다라고 있을 것이니...




작가의 이전글 나는 한국인이다! 일본 종합상사맨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