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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Mar 31. 2021

누이의 추억

살기 힘들다 함부로 말하지말라


누이는 12남매 중 막내였다.


하지만 누이 위로 있었던 열한 명의 자식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열 살을 미처 채우지 못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떠났다. 다들 무지無知했던 탓도 있었지만, 설사 원인을 알았다고 해도 제대로 치료할 돈이 없었다. 지독한 가난이 결국 문제였던 것이다. 시대가 그러했다.


그저 팔자려니 하는 푸념과 함께, 죽은 아이는 거적에 말아 마을 뒷산 골짜기에 버리듯 파묻고 돌아오는 것이 전부였다.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산 사람은 살아야 했다. 그러나 입이 줄었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만큼 가난의 골은 깊었다.


설상가상 누이의 아버지마저 속병이 깊어 몇 해 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 이제 살아갈 방법이 막막해진 누이의 어머니는, 국민학교를 갓 졸업한 누이를 고심 끝에 부산으로 보내기로 했다. 대처大處에 나가 식모살이라도 하면 적어도 배를 곯는 일만큼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당시만 해도 형편이 괜찮은 집들은 부엌일을 거드는 식모를 두거나, 허드렛일을 도맡는 사람을 부리는 경우가 많았다.


먼 친척이지만 정情이 많은 우리 아버지에게 부탁하면 그런 식모 자리 하나 정도는 충분히 주선해 줄 거라는 가늠을 했던 것 같다. 그런 사정으로 누이가 우리 집에 오게 되었으니 그것이 1983년, 그러니까 내가 열세 살 되던 해, 봄의 일이다.




키는 오히려 나보다 한 뼘 이상 작았다. 다듬지 않아 제멋대로 자란 더벅머리, 주근깨가 잔뜩 덮인 까만 얼굴, 누렇게 빛이 바랜 블라우스에 무릎이 툭 튀어나온 골덴 바지, 밑창이 덜렁거리는 낡은 운동화. 그리고 제대로 잠기지 않는 지퍼 달린 옷 가방 하나.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누이의 첫 모습이다.


하물며 마루 위로 올라왔을 때 누이는 심지어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그것을 본 엄마는,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아버지에게 따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는 곧 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셨다.


니보다 한 살 많으니까 누나라고 불러라.


아버지의 말에 나는 기분이 묘했다. 싫은 것도, 내키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저런 사정은 진작에 들었던 터라 누이의 등장이 그렇게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어린아이가 남의 집에 가서 어떻게 식모살이를 할 수 있을까. 누이를 맞닥뜨린 그 순간까지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누나라지만 겨우 나보다 한 살이 많은, 열네 살짜리 여자 아이일 뿐인데.


누이가 들고 왔던 가방 (사진 출처:추억 상회)


외출했던 엄마와 누이가 한참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덥수룩하던 머리는 제법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마른버짐 위로 땟국이 줄줄 흐르던 얼굴도 조금은 깨끗해 보였다. 아마도 목욕탕과 미장원을 다녀온 듯했다. 그리고 그 낡고 촌스럽던 옷들이 어느새 새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 비싼 것들은 아니었다. 식모살이든 뭐든 그것은 둘째 치고, 우선 형편없었던 차림새가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 같다. 어쨌거나 엄마에게는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그 날 저녁, 누이가 엄청나게 밥을 많이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신없이 밥을 퍼먹는 모습에 나는 솔직히 겁이 났다. 저렇게 먹다가는 배가 터질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그러나 아무 말씀도 않으셨고, 엄마는 또 마른 코를 풀었다.




다음날, 누이는 등교登校하는 나보다 먼저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또 그다음 날은 오후에 나갔다가 저녁 늦게 아버지와 함께 돌아왔다.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식모살이할 집을 알아보고 오는 것이리라 그저 가늠할 뿐이었다. 나는 누이와 딱히 이야기를 나누거나 장난을 치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누이도 서로의 눈치를 꽤 많이 보았던 것 같다.


얼추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집에 왔는데 누이가 보이지 않았다. 역시 아버지와 외출한 것 같았다. 그런데 저녁이 되자 아버지만 돌아오셨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아버지, 누나는요?


응, 취직했다. 그래서, 갔다.


아버지의 설명은 덤덤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린아이를 남의 집 식모로 보내는 것은 아버지 입장에서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식모살이, 굳이 해 보지 않아도 그 서러움이란 얼마든 헤아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친분이 있던 지인에게 부탁해서 대우 실업에다 일자리를 하나 마련했다. 대우실업은 양복, 셔츠 등의 옷감을 만들던, 당시 부산 인근에서 가장 큰 방직 회사였다.


누이의 나이가 어렸으니 우선은 미싱 시다(재봉 보조)로 들어간 다음, 이후에 경험이 쌓이고 나이가 되면 정식 직원이 되는 거라 했단다. 게다가 기숙사와 식사까지 제공되니 여러 모로 좋은 조건이었다. 정말 다행이라며 엄마가 이제야 안심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식모살이보다야 백 배 낫다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열네 살 여자아이가 이젠 봉제 공장이라니. 열네 살이면 중학교 일 학년 나이에 불과한데 말이다. 내색은 안 했어도 나는 마치 내가 공장 일을 하게 된 것처럼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어느 일요일 오후에 뜻밖에 누이가 집에 왔다. 문을 열어준 엄마는 이번에도 눈물부터 훔쳤다. 누이를 본 나는 반가운 티는 내지 못하고 엄마 뒤로 숨어 앉아 누이를 힐끗힐끗 쳐다보기만 했다. 누이는 몰라볼 만큼 피부가 하얘져 있었다. 집으로 들어온 누이가 대뜸 나에게 과자 한 봉지를 내밀었다. 새우깡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다가 겨우 그것을 받아 들었다.


첫 월급을 받았다며 그것을 가져왔다고 했다. 월급 칠만 오천 원.


거기서 기숙사비와 식대, 그리고 누이의 용돈 천 원 그리고 새우깡 한 봉지 값을 뺀 나머지를 고향 엄마에게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아직 미성년자라서 은행 통장을 만들 수도 없고, 평일에는 일을 해야 해서 자유롭게 외출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저녁을 먹고 가라는 엄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누이는 서둘러 일어났다. 빨리 가서 자고 싶다고 했다.


아침 여덟 시부터 밤 열 시까지 매일 열서너 시간, 잔업까지 일주일에 엿새를 꼬박 그렇게 일하면서 한 달 동안 번 돈, 칠만 오천 원. 누이가 두고 간 월급봉투를 보며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한참 만에 누이가 참 기특하다고 하셨다.


적어도 그날만큼은 나는 아버지에게 용돈 달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당시 누이 또래였을 여공들 (사진 출처:한국일보)


누이는 매달 날짜를 지켜 다녀갔다. 변함없이 월급을 가져왔고, 그리고 변함없이 새우깡을 사 왔다. 다른 과자도 충분히 먹을 수 있는데 혹시 대우 실업이 아니라 농심에 다닌 건가? 그리고 누이는 올 때마다 조금씩 세련되었다. 달리 눈에 띄는 화장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줄어드는 사투리 억양만큼이나 점점 도시 사람이 되어가는 듯했다.


몇 달 후에는 누이의 어머니가 고향에서 올라왔다. 엄마를 만날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는지 누이는 대문간에서부터 울며 들어왔다. 그날 밤새도록 모녀母女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면서 누이의 어머니가 통곡하던 말이 생각난다.


자식새끼 열 하나를 저 세상 보내고, 마지막 하나 남은 이 어린것을 돈 벌러 보내다니.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그 날조차도 누이는 새우깡을 잊지 않았다. 나는 행여 소리가 날까 봐 이불을 덮어쓴 다음, 새우깡을 씹지 않고 입 안에서 우물우물 녹여 먹었다.




이듬해 봄부터 누이는 야간 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과정을 배우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힘든 일을 마치고 또 밤에는 학교 공부라니. 집에 올 때마다 책을 들고 와서 대학생인 우리 누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때가 있었다. 누나도 엄마도 누이를 대단하다고 했다. 반대로, 어쩌다 내가 게으름을 피우거나 학교 성적이 떨어질 때면 누나와 엄마는 종종 누이를 들먹였다.


그런데 중학교 과정을 거의 끝마쳐갈 무렵, 갑자기 누이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남의 밭일을 하다가 경운기에 받혔는데 그게 화근이 되어 병석에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누이는 이제 자신이 진짜 고아가 되었다며 아버지 앞에서 정말 서럽게 울었다. 아버지도, 엄마도 이제 여기를 네 집이라고, 우리를 네 부모라 생각하라며 다독이셨다. 누이의 눈에서 방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던 그 서럽던 눈물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은 누이를 거의 볼 수 없었다. 일요일에도 나는 학교나 독서실에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늦은 밤, 내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새우깡을 볼 때면 그 날 오후에 누이가 다녀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군 입대를 앞두고 있던 92년 1월 즈음, 누이가 어떤 남자를 데리고 찾아왔다. 결혼할 사람인데 누이에게 달리 부모가 없다 보니 같은 격이라 생각하고 인사 온 것이라 했다. 부모님은 누구보다도 기뻐하셨다. 화물차 기사 일을 한다는 남자는, 누이보다 다섯 살이 많았는데 인물이 훤했고 덩치가 좋았다. 시원시원한 성품이라 누이를 든든하게 잘 지켜줄 것 같았다.


날더러 처남이라고 불렀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 해 2월, 내가 입대했기 때문에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이듬해 상병 휴가를 나왔을 때는 운 좋게도 젖먹이 아들을 안고 우리 집에 놀러 온 누이를 만날 수 있었다. 애가 애를 낳았다며 나는 누이를 놀렸다. 그 말에 누이가 웃었다. 처음 보는 누이의 웃음이었던 것 같다. 당시의 누이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98년 가을, 누이의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교통사고였다. 화물을 가득 싣고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타이어가 터지는 바람에 트럭이 그만 전복되고 말았다. 운전석에서 튕겨져 나온 자형은 그 차가운 길 위에서 눈을 감았다. 스물아홉 살 아내와 여섯 살짜리 아들을 남겨 두고 말이다.


자형의 장례 이후로 누이는 두 번 다시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연락도 아예 끊어버렸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라며 굳이 찾지 말라 했고, 엄마는 혹시 몹쓸 생각을 한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하며 주소를 물어물어 누이의 집을 찾아다녔지만 그때마다 이사를 가버린 뒤라고 했다. 엄마는 이후로도 누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결국 눈시울을 적셨다. 그래서 나는 내심 그런 누이가 괘씸하기도 했다.


지난 이야기를 하던 중에 누이가 집에 올 때마다 새우깡을 사 왔던 이유를 엄마는 그제야 말해 주셨다.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누이가 맨 처음 우리 집에 오던 날, 내가 배를 깔고 엎드려 새우깡을 먹고 있더란다. 누이는 그것이 정말 먹고 싶었지만, 그러나 차마 한 개만 달라는 소리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새우깡을 좋아한다는 생각에, 그리고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누이 스스로의 창피함 때문에 매번 새우깡을 사 오는 것이라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공연히 마음이 짠해졌다. 새우깡, 그까짓 게 뭣이라고. 참 정말 진짜 못난 누이다 싶었다.


어디에 살든, 연락을 하든 말든 그저 아들 키우며 잘 살고 있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엄마의 소박한 바람이었다. 그렇게 누이는 우리 가족들로부터 점점 잊혀져 갔다.




누이로부터 다시 연락이 온 것은 2017년 초겨울이었다. 누이의 전화임을 확인하는 순간, 까무러칠 뻔했다는 엄마는 서둘러 아버지와 함께 누이를 만나러 갔다. 경남 양산에 있는 요양 병원. 이십여 년 만에 우리 부모님을 다시 만난 누이는 췌장암 말기로 투병 중이었다.


그 날은 내가 동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그리고 누이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저 암 투병 중인 누이의 슬픈 하소연과 그것을 듣는 엄마의 눈물, 그리고 아버지의 속 깊은 한숨이 그 자리의 전부가 아니었을까 싶다.


엄마는 그 뒤로도 자주 누이의 병문안을 가셨던 것 같다. 내게도 부산 다녀갈 일 있으면 같이 가보자 하셨지만 나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한사코 싫다고 했다. 시간이야 만들기 나름이었지만, 암 투병 중인 누이의 모습을 왠지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 이듬해 봄, 힘든 투병 생활을 마친 누이는 고운 가루가 되어 형제들이 먼저 누워있는 고향 마을 뒷산에 뿌려졌다. 그때 누이의 나이, 마흔아홉이었다.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처음 만나던 날이 마치 어제인 것처럼 누이의 모습은 생생하기만 하다. 그 모습 뒤로 이어졌을 누이의 인생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것이었을지 내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이제는 모든 것 내려놓고 그저 그곳에서 행복하시기만을 바랄 뿐이다.


진심으로.


사실 나는 새우깡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사진 출처 : 농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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