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우 Mar 31. 2021

목욕의 추억

그 시절로 돌아가야할 이유, 흐흐흐


그 해 가을, 엄마의 건강이 썩 좋지 않았다.


웬만해선 아픈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엄마인데, 자리를 깔고 누운 것을 보면 당신 스스로도 꽤나 버티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미련하게 참지만 말고 병원에 얼른 가 보라는 아버지의 말에 엄마는 뜬금없이 나를 불러 앉혔다.


엄마는 엄마가 알아서 할 테니 니는 내일 아버지랑 목욕탕 가라. 더러워서 안 되겠다.


형님이라는 말을 할 줄 아는 까마귀가 정말 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렇게 해서 나는 아버지를 따라 난생처음 남탕男湯에 가게 되었다. 내 나이 아홉 살, 국민학교 2학년이던 1979년 가을이었다.


이젠 오른쪽 출입구란다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아홉 살이 되도록 엄마와 함께 여탕女湯에 간다는 것은 사실 내게도 꽤나 부끄러운 힘든 일이었다.


계산대 앞에서 무릎을 살짝 구부려 키를 낮춘 다음, 혀 짧은 소리로, 아직 학교 안 다니는데요 하는 것이 우선 힘들었다. 대체 너는 몇 년째 일곱 살이냐는 주인아줌마의 비아냥이 싫었다. 그리고, 혹시나 같은 반 여자 아이들을 마주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아랫도리를 두 손으로 가린 채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피는 것도 역시 힘들었다. 구석자리를 골라 고개를 푹 숙이고 결국 물 바가지를 덮어쓰고 있는 것 역시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엄마가 시키는 대로 그 뜨거운 탕 속에 삶겼다가 들고나기를 반복하며, 씻어도 씻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장장 세 시간이 넘는 와의 사투死鬪가 가장 힘들었다. 이러다간 곧 살갗이 닳아 뼈가 튀어나올 지경인데 그런 내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그저 우악스럽게 내 몸의 때를 쉬지도 않고 벗겨내는 엄마가 그래서 싫었다.


이제 남은 때가 없으니 그만 씻고 제발 집에 가자고 칭얼대다가 서너 번 쥐어 박히는 것은 다반사였고, 목욕탕을 나와서는 남 부끄러워 혼났다며 야단치는 통에 끝끝내 눈물을 질질 짜며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다시 말해 그 당시의 목욕이란 내게 있어 한마디로, 가장 싫어하는 월례 행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아버지와 목욕이라니. 아빠랑 목욕 가면 끝내주게 재미있다는 친구들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엄마가 아프다는 사실도 잠시 잊고 아버지랑 목욕 갈 생각에 그저 즐겁고 설레서 잠도 제대로 못 잘 지경이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아버지의 목욕 준비는 그지없이 단출했다. 엄마였다면 이것저것 챙기느라 세숫대야 하나가 넘칠 차림이었겠으나 아버지는 그저 수건 한 장, 때수건(이태리타월) 하나, 때수건 속에 넣을 작은 걸레 하나, 목욕 비누 하나, 그리고 면도기 한 개, 그것이 전부였다. 물론 엄마가 이것저것 더 챙기려 했지만, 아버지는 됐소 됐소 하며 웬만한 것은 도로 꺼냈다.


집을 나서는 우리 부자父子의 등에 엄마의 지청구가 또 쏟아졌다. 머리는 어떻게 감고, 온탕에는 얼마 동안 들어가 있어야 하고, 얼굴은 어떻게 하며, 손과 발은 어떻게 씻겨야 하고. 아버지는 대문을 쾅 닫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젠 더 이상 아랫동네의 삼정탕까지 멀리 갈 이유가 없어졌다. 집 가까운 곳에 바로 동산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동산탕의 유리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반가운 얼굴이 계산대에 앉아 있었다. 우리 반 명국이었다.


어, 제이야. 니 인자 우리 집에 목욕 오나? 와, 반갑데이.


같은 반 친구라는 말에 아버지는 명국이에게 칭찬부터 했다. 일요일 아침에 부모님도 도와드리고, 명국이 참 착하네. 명국이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으며 옷장 열쇠를 건네주었다.


탈의실 특유의 냄새가 있습니다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탈의실 가운데 놓인 평상에는, 여유롭게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도 있었고, 발톱을 다듬는 할아버지도 보였다. 한쪽 구석에는 이발소에서 보던 의자가 하나 있었다. 그 날은 머리 깎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흰 가운을 입은 대머리 아저씨가 의자 주위의 바닥을 쓸고 있었다. 남자 목욕탕엔 이발소도 있구나.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나는 옷장 아래의 공간에 신발부터 넣고, 옷을 벗어 아버지께 드렸다. 아버지는 우선 당신의 옷을 잘 정리해서 차곡차곡 넣은 다음, 그 위에 내 옷을 올려 두었다. 그리고 문을 잠그고는 옷장 열쇠를 내 발목에 채워 주었다. 이거 잃어버리면 우리, 집에 못 간데이. 걸을 때마다 발목에서 찰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것이 남탕이 주는 무게감인가? 나는 은근히 긴장이 되었다.


남탕이 주는 무게감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욕탕의 유리문을 열고 아버지를 따라 들어갔다. 후욱 몰려나오던 더운 김이 사라지자 내 눈 앞에 펼쳐진 남탕의 풍경은 내가 이때까지 봐왔던 욕탕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철퍽철퍽 빨래를 하는 사람도 없었고, 온몸에 우유를 들이붓는 누나도 없었다. 얼굴에 오이를 덕지덕지 바른 채 팔다리를 쩌억 벌리고 드러누운 아줌마도 없었고,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서로 죽이네 살리네 하며 싸우는 아줌마들도 없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우는 소리도 전혀 없었다. 지극히 조용한 가운데 어허 어허 하는 장탄식과 물 첨벙거리는 소리만 가끔 들릴 뿐, 남탕은 그지없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아버지는 우선 샤워기가 달린 거울 앞에다 깔개 의자 두 개로 자리를 잡았다. 의자 가운데 구멍이 있었다. 아버지는 우선 내 몸에 물을 끼얹은 다음, 곧장 머리부터 감겼다. 아버지가 입으로 스으스으 소리를 냈다. 그다음엔 수건에 비누칠을 해서 그것으로 내 몸 구석구석을 문지르고는 이내 샤워기로 헹궈 냈다. 모두 마치는 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곤 내 엉덩이를 찰싹 때리면서 그러셨다.


이제 가서 놀아라. 아버지가 부르면 바로 온나, 알겠제?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놀다 오라고? 목욕탕에서 놀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근데 뭘 하고 놀지? 일단 나는 다른 조무래기들 몇을 따라서 바가지 두 개를 포개어 들고는 냉탕에 들어가서 퐁당거렸다. 수영장이 따로 없었다. 찬물이 출렁거리자 지나던 아저씨가, 얌전히 놀아야지 하며 점잖게 나무랐다. 나는 공연히 멋쩍어서 냉탕을 나와 다시 슬그머니 온탕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아버지가 나를 찾는 건 아닌가 싶어 수시로 시선을 맞추면 그때마다 아버지는 그저 싱긋 웃기만 했다. 아버지는 옆에 앉은 아저씨와 서로의 등을 밀어주는 것 같았다. 내가 아버지의 등을 밀기에는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가벼운 미소, 때수건, 등만 서로 내밀면 정성껏 서로를 씻겨주는, 정말로 아름다운 이심전심의 풍경을 그때 처음 본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면도하는 모습 역시 그 날 처음 보았다. 비누를 잔뜩 칠한 얼굴에 혀로 볼을 밀어내며 이리저리 면도하는 모습이 조금은 웃겼다. 내가 원숭이 흉내 낼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쯤 면도를 하게 될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탕 속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아버지가 씻는 모습을 훔쳐 보는 것은 정말 재미있었다.


그 시절 그 목욕탕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한참을 놀았더니 얼굴이 잘 익어 발그레 달아올랐다. 밖으로 나가 주전자의 물을 한 컵 마시고 들어오자 마침 아버지가 내게 오라는 손짓을 했다. 아버지는 나를 의자에 앉히고 내 몸의 구석구석 때를 벗겨 주셨다. 그러나 무리하지는 않았다.


엄마가 내 몸에서 때를 뜯어내는 것이었다면, 아버지는 그저 온순한 놈들만 골라내는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때는 벗기고 나머지 것들에게, 너희들은 그냥 그대로 있으렴. 아버지는 또 한 번의 비누칠을 함으로써 내 목욕을 마무리했다. 엄마였다면 이제 겨우 한쪽 손을 마쳤을 시간이다. 이렇게 빨리 끝내도 되나 하는 걱정이 오히려 들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믿었다.


목욕 가방을 챙겨 탈의실로 나왔다. 아버지는 수건을 탈탈 털어 내 몸을 닦아주시고는 드라이기로 내 머리를 말렸다.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그 냄새가 좋았다. 겨드랑이와 사타구니까지 아버지가 뜨거운 바람으로 장난을 쳤다. 간지러웠다. 내가 몸을 배배 꼬니 아버지는 그게 또 재미있었나 보다. 머리와 몸을 제대로 말린 다음, 거울 앞에 놓인 화장품을 손바닥에 척척 붓더니 내 얼굴에 찰싹 발라 주셨다. 순간 얼굴이 화끈했다.


발목에서 달랑거리던 열쇠를 빼 옷장을 열고, 처음 올 때처럼 옷을 다시 챙겨 입었다. 아버지는 내게 체중계 위로 올라 서 보라고 했다. 빨간 바늘이 타라락 흔들렸다.


십구 킬로? 제이야, 니 밥 좀 많이 묵어야겠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냉장고 유리문을 열어 요구르트 한 병을 꺼내 빨대를 탁 꽂아서 내게 주셨다. 달콤한 요구르트가 내 입에 호로록 들어왔다. 아, 아버지와의 목욕이란 이런 것이구나.


아버지는 아무것도 드시지 않고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셨다. 그때의 아버지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명국이에게 인사를 하고 목욕탕 밖으로 나오자 시원한 바람이 다시 얼굴에 화악 닿았다. 아버지가 갑자기 나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무등을 태워 주셨다. 우리 아들, 노래 한 개 해봐라.


내가 그 날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꽃밭에서였나, 짱가였나? 하여튼 그날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큰 아홉 살이 되어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아버지의 넓고 편한 어깨 위에서, 요구르트를 들고 노래를 부르면서, 그저 우리 집이 좀 더 멀었으면, 이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엄마의 잔소리가 역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벌써 오면 어떻게 하느냐, 제대로 씻었느냐, 때를 벗기고 오랬더니 불려서 왔네, 내가 못 산다, 부엌에 가서 다시 씻자, 아까운 목욕비만 날렸다. 돈이 사백 원이면 콩나물이 얼만데.


엄마의 성화가 싫었던 아버지가 나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 했다. 나는 그 의미를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엄마 몰래 아버지를 향해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살짝 그려 보였다. 엄마가 내 등짝을 때리건 말건 그 날만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처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목욕을 갔던 것도 벌써 사십여 년이 지난 일이 되어 버렸다.


가끔 본가本家에 내려가면 반드시 아버지를 모시고 사우나에 간다. 아버지는 이제 당신 몸 하나 씻는 것도 버거워하는 연세가 되셨다. 그래서 웬만하면 내가 직접 몸을 씻겨 드린다. 하지만 조금씩 야위어 가는, 그리고 조금씩 늙어가는 아버지의 몸 구석구석을 내 손으로 만지며, 내 눈으로 보며 씻겨 드리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꽤나 속상한 일이다.


그래서 때로는 호사豪事를 핑계 삼아 일부러 세신사洗身師의 도움을 받는 불효를 하기도 한다. 세월의 흐름이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일이라 하지만, 사람의 마음 가는 길이 먼저 걸었던 이들의 가르침대로만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사우나 휴게실에서 아버지는 몸에 좋다는 건강 음료는 굳이 마다하고 무조건 값싼 요구르트만 찾으신다. 요구르트를 쪽쪽거리던 어린 나를 내려다보던 아버지, 아버지의 그 마음을 사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겨우 알 것 같다.


그리고 아버지가 이젠 더 이상 스스로를 미안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줌싸개의 추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