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또, 머 때문에?”
찬우의 입에서 저절로 짜증 섞인 말이 튀어나왔다. 명희는 팔을 걷어붙이며 따지기 시작했다.
“니는 수아가 앉으라 한다고, 내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보고 있는데 그 옆에 철썩 앉나?”
“그기 아이고……”
“아이기는 머가 아이고? 내가, 창피한 거 알면서도 다른 애들 앞에서 니를 내 옆에 앉으라 했는데, 그랬는데도 니는 거기 앉나? 그라고 싶더나?”
“그기 아이고……”
“방도 예쁘고, 수아 가시나, 얼굴도 예쁘고, 그래서 눈이 휙휙 돌아가제?”
“그기 아이고……”
“그라고, 니……아까, 수아 손 잡았제?”
“그, 그거는……”
“됐다. 듣기 싫다. 바보 같은 머스마. 할 말이 없으니까 그기 아이고, 그기 아이고. 니는, 내가 있는데 그랄 수 있나? 수아가 손 잡으라 한다고 좋아 갖꼬 헤벌레 하믄서 덥썩. 아이고 영광입니다, 공주마마, 이러면서 그랄 수 있나? 엉? 말해 봐라, 어서.”
“머, 멀 말이고?”
명희가 갑자기 홱 돌아서면서 말했다. 명희의 눈이 반짝거렸다.
“니, 이수아 좋아하제?”
“머, 머라꼬?”
“니, 쉬는 시간에도 이수아 쳐다보면서 헤벌레 하데? 내가 불러도 대답도 안 하고, 알겠다. 이제 내, 니 맘 다 알겠다.”
“……”
“내 같이 할매하고 사는 못생긴 애보다 예쁜 엄마하고 사는 공주가 더 좋다 이거제?”
“바, 박명희. 니 와 그라는데?”
“시끄럽다. 됐다. 이제 니 꼴도 안 볼 끼다. 내는 갈 거다. 잘 묵고 잘 살아라. 보리 문딩이하고 서울내기 다마네기하고 잘 묵고 잘 살아라.”
명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탁탁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갔다.
찬우는 그런 명희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생일잔치를 마치고 수아 집을 나섰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고 날이 어둑어둑해진 뒤였다.
“니, 많이 묵었나?”
아섭이가 현광이에게 물었다.
“아이고, 배가 터질라 한다. 니는?
“말도 마라. 나는 중간에 변소 갔다 와서 또 묵었다 아이가.”
“하여튼 이런 날, 더도 말고 한 달에 한 번씩만 있었으면 좋겠다. 맞제?”
“근데 박명희, 그 가시나는 머 때문에 중간에 갔노? 내 노래 듣다 말고.”
아섭이의 말에 배를 두드리며 병철이가 답했다.
“배가 아프다믄서 갔잖아?”
“배가 아픈 기 아이고, 아섭이 니 노래가 엉망이라서 그런 거겠지.”
“니, 또 감자 하나 묵을래?”
“아이고, 사양합니다요. 배가 불러 죽겠습니다요, 대감마님.”
아섭이는 취권을 하는 성룡의 흉내를 내며 큰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이수아는 좋겠다. 엄마도 예쁘고, 생일잔치도 하고, 선물도 많이 받고.”
찬우는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명희에게 신경이 쓰여서 수아에게 선물 주는 것을 깜빡 잊어버렸던 것이다.
“아, 맞다. 깜빡했네.”
“먼데, 찬우야?”
“아버지가 심부름시킨 게 있었는데 깜빡했다. 머 좀 사러 가야 된다.”
“우리가 같이 가까?”
“아, 아니다. 늦었으니까 먼저 가라. 내일 보자.”
찬우는 손사래를 치며 급히 오던 길을 되돌아 뛰어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병철이가 말했다.
“그쪽으로는 갈 데가 딱 한 군데밖에 없는데. 이제 다 묵어서 남은 것도 없을 낀데……”
찬우는 수아네 집 앞 골목에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양장점의 불은 이미 꺼졌지만 수아의 방은 불이 환했다.
찬우는 손을 모아 나팔을 만들어 크게 불렀다.
“이수아, 이수아.”
벌써 자는 건가? 다시 부르려는데 창문이 활짝 열렸다. 수아가 내다보았다.
“어, 찬우네? 무슨 일이야?”
“저, 이수아. 저 잠깐만 내 좀 보자.”
“그래, 기다려. 내려갈게.”
잠시 후 수아가 계단을 내려왔다.
“응, 무슨 일이야? 뭐 두고 간 거라도 있니?”
수아가 궁금하다는 듯 큰 눈을 깜빡거렸다.
“어, 그, 그게 딴 기 아이고.”
“뭔데? 아이 참, 궁금해 죽겠네. 말해봐.”
찬우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며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내밀었다.
“어? 이게 뭐야? 색연필이네? 예쁘다.”
“이수아 니 줄라꼬 아까 가지고 온 건데 깜빡했다.”
“야, 정말 예쁘다.”
“새, 생일 축하한다. 이수아.”
“고마워, 찬우야.”
찬우는 이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데 찬우야.”
“으, 으응?”
“넌 왜 나를 수아라고 안 부르고 자꾸, 이수아, 이수아 그러니?”
“……”
“그냥 수아라고 불러. 친구잖아.”
생각해 보니 그랬다.
남자아이들끼리는 당연히 서로의 이름만을 불렀지만, 여자 아이들을 부를 때는 꼭 성을 붙여 불렀다. 그것은 여자 아이들도 마찬가지여서, 남자아이들의 이름만 불렀다가는 우물터 담벼락에, 아무개가 아무개를 좋아한대요 하는 낙서의 주인공이 되기 십상이었다.
유독, 명희만 찬우를 이름으로 부를 뿐, 찬우도 명희를 부를 때는 성을 붙여 꼭 박명희라고 했다.
“그, 그래도……”
“괜찮아. 수아라고 불러도 돼. 불러 봐.”
“……”
“이제 보니 찬우 넌 겁쟁이구나. 애들이 놀릴까 봐 그러는 거지?”
“아이다. 그런 거 아이다.”
“그럼 빨리 수아라고 불러 봐. 나 올라가야 돼. 숙제하다 왔어. 빨리, 응?”
찬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나 누가 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술을 앞으로 내밀고 말했다.
“수, 수아.”
“아이, 그렇게 말고, 수아야,라고 해야지. 빨리.”
“수, 수아야.”
수아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래, 그래. 잘하는군. 하하. 찬우야, 우리 엄마가 너 참 잘 생겼대. 그리고 착해 보인대.”
그러면서 수아가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그, 그래?”
찬우는 진땀이 났다.
“찬우야, 우리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자.”
당황한 찬우가 머뭇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수아의 얼굴이 눈앞으로 확 다가왔다. 깜짝 놀란 찬우가 뒤로 물러서려는데 담벼락이 등에 닿았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수아의 얼굴이 더 켜졌다. 찬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영산홍 꽃 같은 좋은 냄새가 코로 확 들어왔다.
수아가 찬우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수아가 찬우의 귀에다 조용히 속삭였다.
“찬우야, 나, 너 좋아해.”
‘이 가시나가 지금 머라 하는 기고?’
찬우는 가슴이 콩닥거리고 숨이 찼지만 차마 눈을 뜰 용기가 없었다. 그저 주먹을 꽉 쥐고 바르르 떨면서 서 있을 뿐이었다.
곧 영산홍이 멀어졌다.
“찬우야, 잘 가. 내일 보자.”
수아가 웃으며 문을 닫고 뛰어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빨리 돌아가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눈을 감은 채로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