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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Jul 08. 2022

부부 싸움엔 짜파게티

향기로운 추억


   신혼新婚 때라면 눈만 마주쳐도 불타오를 것이 뻔한데 그 소중한 시간에 왜 부부 싸움을 한다는 것일까? 갓 결혼한 지인들의 불화不和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나는 아내에게 그렇게 묻곤 했다. 장모의 극렬한 반대를 뚫고 어렵사리 결혼을 쟁취한 우리에게 신혼의 다툼이란, 그저 다른 사람들의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연애하는 동안 속앓이를 하느라 매일 눈가를 훔치던 아내의 모습이 내게는 큰 빚으로 남아 있었다. 그것이 안쓰러워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아내와는 절대 싸우지 않겠다며 신혼여행 때부터 굳은 다짐을 했었다.


   그 무렵, 나는 분당에서 문래동으로 출퇴근을 했고 아내는 강남에 있는 회사를 다녔다. 퇴근 시간이 서로 달라 우리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래서 평일의 아내는 동료들과 저녁을 먹거나 친정에 들러 식사를 해결하고 올 때가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보다 조금 일찍 돌아온 저녁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아내는 없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샤워를 하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노크에 이어, 저녁을 먹었냐고 아내가 욕실 문 앞에서 물었다. 이미 식사를 마쳤을 텐데 굳이 번거롭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괜찮다는 답을 하기도 전에 아내의 말이 먼저 이어졌다.

   “라면 하나 끓여줄까?”


   머리를 말리는 동안 아내가 준비를 끝냈다. 앙증맞은 라면 냄비와 잘 익은 김치가 하얀 식탁 위에 예쁘게 놓여 있었다. 의자를 끌어당겼다. 흐뭇한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내도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만들어 보였다.

   뚜껑을 열자 뜨거운 연기와 맛있는 냄새가 화악 피어올랐다. 여태 잊고 있던 허기가 그제야 몰려왔다. 행복에 젖은 혀가 아랫입술에다 침을 발랐다. 탁탁 젓가락을 고쳐 쥐고 면麵을 막 건지려던 참이었다. 그때였다.

   “오빠.”

   “응?”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했다. 그럼 그럼, 나도 사랑하지. 하늘만큼 땅만큼. 뽀뽀는 일단 밥부터 먹고 나서 나중에. 그런데 아내의 말은 그런 답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나, 한 젓가락만 먹어도 돼?”

   으응? 라면 한 젓가락? 난 또, 그게 무슨 어려운 일이라고.

   “당연하지.”

   선심 쓰듯 내 젓가락을 건네주었다. 히힛. 아내가 콧소리를 냈다.

   한 손에 뚜껑을 받쳐 든 아내는 여전히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는 냄비 속으로 젓가락을 푸욱 꽂았다. 그리고는 손목을 야무지게 놀려 크게 한 바퀴를 휘젓더니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어어? 아내의 손은 내 이마보다 높이 올라갔고, 젓가락 아래로는 제대로 낚인 면들이 펄떡거렸다. 그야말로 월척이었다. 어어? 면어麵魚를 조심스럽게 뚜껑에 내려놓은 아내는 빨간 김치 한 조각을 그 위에 올렸다. 어어? 면과 김치를 가지런히 챙긴 아내가 고개를 살짝 숙이는가 싶더니 우아앙 입을 크게 벌려 그것들을 재빨리 흡입하기 시작했다. 어어? 후루루룩 아삭아삭 후루룩. 서너 번의 젓가락질만으로 월척 한 마리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터질 듯한 볼을 슬며시 양손으로 가리며 아내가 조심스레 말했다.

   “이제 오빠 먹어.”


   젓가락을 받아 들고 국물 안으로 천천히 넣었다. 어떠한 걸림도 없이 곧장 바닥이 느껴졌다. 허전했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주욱 긁었지만 역시나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흑흑, 왕건 대장님은 아까 잡혀 갔어요. 젓가락이 지나간 자리에는 불쌍한 패잔’면’ 몇 가닥들만이 힘없이 떠올랐다.

   처음 만난 날로부터 얼추 이년이 되도록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달랑 국물만 남은 냄비를 젓가락으로 훑고 있자니 그 순간 처음으로 화가 났다. 마침내, 드디어 우리도 싸우게 되는구나. 원인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탁 소리가 나게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놓고는 벌떡 일어섰다.

   생각 같아선 식식거리면서 아내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쿵쾅쿵쾅 사라져야 되는데 원룸이나 다름없는 열두 평짜리 아파트에서 몸을 숨길 마땅한 곳은 달리 없었다. 할 수 없이 방과 이어진 좁은 베란다 난간 앞에 쪼그리고 앉아 두 팔로 무릎을 감쌌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깜깜한 밤하늘엔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별도 누가 다 건져 먹었나?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때 누군가 내 귓가에다 속삭였다.

   '옳지, 잘한다. 너도 화를 낼 줄 아는 사람이란 걸 이번 기회에 확실히 보여주라고. 지금 밀리면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된다? 내친김에 한마디를 더 해버려!'

   용기가 샘솟았다. 싸움이니까 일단은 이기고 보자. 아내가 충분히 들을 수 있도록 혼잣말을 했다.

   “차라리 두 개를 끓이던지. 한 젓가락만 먹는다고 해 놓고선 홀라당 그게 뭐야? 내가 그렇게 우스워?”


   우습지 않았던 것인지 아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대신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났다. 설거지를 하는 것일 게다. 그릇 정리가 끝나면 당연히 내게 사과를 하겠지? 받아줄까 말까? 하는 것 봐서. 그래도 길게 가면 안 되겠지? 우린 신혼이니까.

   냄비 하나, 김치 그릇 하나, 젓가락 하나가 전부일 텐데 설거지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듯했다. 뭘 하고 있는지 슬쩍 고개를 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버티자.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 나는 마치 얼어붙은 사람처럼 꼼짝도 앉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대략 이십 분쯤 지났을까?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럼 그렇지. 드디어 사과하러 오는 거겠지? 그런데 중간에서 뚝 멈추더니 곧 무언가를 탁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구수한 냄새가 갑자기 풍겨오기 시작했다. 아니 이, 이것은? 이것은 분명 내가 익히 알던, 그리고 내가 어릴 때부터 너무나 사랑하던 그 냄새. 이것은 바로 일요일마다 나를 요리사로 만들어 주던 마법의 냄새였다. 아내는 설거지 대신 짜파게티를 끓였던 것이다.

   마음 저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심하게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돌아보기만 하자. 확인만 하자. 안 된다, 흔들리지 말자, 조금만 더 참자. 아내가 먼저 사과할 때까지 조금만, 조금만 더, 응? 그때 아내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바닥에 깔렸다.

   “진짜 안 먹을 거지? 내가 다 먹는다?”

   순간, '다 먹는다'는 말에 자제력을 잃어버린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실로 놀라운 풍경이었다. 작은 밥상을 바로 내 옆에다 차려놓고선 그 위로 짜파게티가 들어있는 냄비를 올려 두었다. 아내는 아까처럼 젓가락으로 월척을 잡아 올린 다음, 냄새가 내게로 향하도록 입으로 후후 불고 있는 것이었다.

   언제나 중요한 건, 그다음, 바로 그다음인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짜파게티를 목격한 그 순간, 차라리 아무 말도 안 했더라면 그나마 알량한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지킬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코를 간지럽히는 짜파게티의 냄새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앉은 걸음으로 엉덩이를 잡아당겼다. 그러면서 전혀 할 필요가 없는 말을 기어이 내뱉고야 말았다.

   “안 퍼졌지? 나는 꼬들꼬들한 것 좋아하는데…”


   비굴했다. 창피했다. 그러나 까만 김이 솔솔 피어오르는 짜파게티 앞에서 비굴이니 창피 따위니 하는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던 아내의 야릇한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결혼 후 이십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크고 작은 일로 아내와 다툴 때가 가끔씩 있었다. 화를 내는 건 대체로 나였고, 묵묵히 듣고 있다가 마지막 대목에서 화해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주로 아내였다. 그 과정에서 짜파게티는 변함없이 큰 역할을 했다.

   단단히 토라진 채로 애먼 별님 달님 탓을 하고 있을 때면, 아내는 여지없이 화해의 냄새를 내게로 불어 보냈다. 그 냄새는 우리 부부가 처음 다투던 날을 소환했고, 때론 실물實物없이 그날에 대한 언급만으로도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잠시 동안의 냉전을 실없이 마무리하기도 했다.


   내일 아내가 부산으로 온다. 간만에 짜파게티를 끓여달라고 할 생각이다. 짜파게티는 누군가를 일요일의 요리사로 만들어 주는 특급 도우미겠지만, 어찌 보면 적어도 우리 부부에 있어서만큼은 ‘4주 후에 뵙겠습니다’를 미연에 막아주는, 그저 고맙고 향기로운 중재자인지도 모르겠다.



* Image by 943836 from Dispa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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