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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Oct 09. 2022

가나다라 #1

분이 이야기


 가물가물한 기억이지만 어린 시절, 고향 마을에는 분이粉伊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가 살았다.


 나와 비슷한 또래였는데 굳이 헤아리자면 열 두엇 즈음 되었던 것 같다. 키는 작았으나 동그란 얼굴에 눈썹이 진했고 오뚝한 콧날과 빨간 입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이 참 예뻤다.


 다들 분이를 볼 때마다 어린것이 불쌍하다며 혀를 끌끌 찼던 것은 그녀의 아비어미가 하나같이 앞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단 말도 있고, 피난길에 떨어진 포탄 때문에 눈을 다쳤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비롯한 동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분이네 초라한 살림을 도와줄 때가 많았다. 


 라일락이 뒷산 여기저기로 흐드러지던 어느 봄날이었다.


 마을에서 시오리十五里 떨어진 곳에는 오일五日마다 장場이 열렸다. 아침나절에 일찌감치 장작을 다 팔아버린 아버지가 막걸리 한 사발에 흥이 올랐던지 미군 부대에서 나왔다는, 그 귀한 '카스테-라' 한 개를 내게 사 주었다. 


 바라지도 않던 선물에 나는 하늘을 날 것만 같았다. 얼른 마을로 돌아가 동네 아이들에게 자랑부터 할 작정이었다. 그래서인지 걸음이 제가 먼저 길을 재촉했다.


 사람들이 개울 근처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마을로 들어가려면 개울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야 했다. 필시 무슨 일이 난 모양이었다.


 아이고 저걸 어째, 저걸 어째. 동네 할머니들 몇은 옷고름을 손에 쥔 채 가슴팍을 쳐가며 발을 동동 굴러댔다.


 자세히 보니 다리 아래 마른땅으로 사람 하나가 축 늘어져 있고 그 옆엔 어린아이가 물에 흠뻑 젖은 채 그 곁에서 울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분이었다.


 차가운 냇물은 그 곁으로 무심히 흘렀다. 분이의 어깨가 물살보다 빠르게 끊임없이 들썩였다.


 카스테-라를 쥔 손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분이 아버지가 죽었구나. 다리를 건너다 물에 빠진 걸까? 


 타인他人의 죽음을 목격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참을 울던 분이가 내 쪽을 향해 몸을 홱 돌렸다.


 파랗게 변해버린 분이의 입술이 맨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곧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입술을 씰룩거리며 무언가를 말했지만 내가 있는 곳에서는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겁이 나서 짐짓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엔 때아닌 하얀 나비가 날았다. 나비가 저만치 사라질 때까지 나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 Image by https://blog.naver.com/hongyw/222760312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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