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이 이야기
가 가물가물한 기억이지만 어린 시절, 고향 마을에는 분이粉伊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가 살았다.
나 나와 비슷한 또래였는데 굳이 헤아리자면 열 두엇 즈음 되었던 것 같다. 키는 작았으나 동그란 얼굴에 눈썹이 진했고 오뚝한 콧날과 빨간 입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이 참 예뻤다.
다 다들 분이를 볼 때마다 어린것이 불쌍하다며 혀를 끌끌 찼던 것은 그녀의 아비어미가 하나같이 앞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단 말도 있고, 피난길에 떨어진 포탄 때문에 눈을 다쳤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비롯한 동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분이네 초라한 살림을 도와줄 때가 많았다.
라 라일락이 뒷산 여기저기로 흐드러지던 어느 봄날이었다.
마 마을에서 시오리十五里 떨어진 곳에는 오일五日마다 장場이 열렸다. 아침나절에 일찌감치 장작을 다 팔아버린 아버지가 막걸리 한 사발에 흥이 올랐던지 미군 부대에서 나왔다는, 그 귀한 '카스테-라' 한 개를 내게 사 주었다.
바 바라지도 않던 선물에 나는 하늘을 날 것만 같았다. 얼른 마을로 돌아가 동네 아이들에게 자랑부터 할 작정이었다. 그래서인지 걸음이 제가 먼저 길을 재촉했다.
사 사람들이 개울 근처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마을로 들어가려면 개울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야 했다. 필시 무슨 일이 난 모양이었다.
아 아이고 저걸 어째, 저걸 어째. 동네 할머니들 몇은 옷고름을 손에 쥔 채 가슴팍을 쳐가며 발을 동동 굴러댔다.
자 자세히 보니 다리 아래 마른땅으로 사람 하나가 축 늘어져 있고 그 옆엔 어린아이가 물에 흠뻑 젖은 채 그 곁에서 울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분이었다.
차 차가운 냇물은 그 곁으로 무심히 흘렀다. 분이의 어깨가 물살보다 빠르게 끊임없이 들썩였다.
카 카스테-라를 쥔 손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분이 아버지가 죽었구나. 다리를 건너다 물에 빠진 걸까?
타 타인他人의 죽음을 목격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참을 울던 분이가 내 쪽을 향해 몸을 홱 돌렸다.
파 파랗게 변해버린 분이의 입술이 맨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곧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입술을 씰룩거리며 무언가를 말했지만 내가 있는 곳에서는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겁이 나서 짐짓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 하늘엔 때아닌 하얀 나비가 날았다. 나비가 저만치 사라질 때까지 나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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