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우 Jul 17. 2022

불량소녀 심청 (2)

아직 못다 한 이야기



   봇짐을 꾸리고 나서 길동은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을음 가득한 낡은 촛대, 나무판을 덧댄 작은 책상, 누렇게 바랜 사서삼경四書三經, 어머니가 정성껏 누벼 주신 이불.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의미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첩의 자식으로 태어난 서자庶子에게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길이란,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심청의 말이 옳다. 발검拔劍 스승께 배운 도술을 쓰자. 부패한 양반들의 재물을 털어 부페를 차리고, 탐관오리의 돈을 빼앗아 오리 식당을 열자. 행복은 지갑에서 나온다던 심청의 지론持論이 참으로 현명한 것이다.’

   심청과의 달콤한 결혼 생활을 상상하니 조금 전까지 무겁기만 했던 길동의 마음도 금세 홀가분해졌다.


   조용히 방문을 닫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휘영청 달이 밝았다. 잰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렀다. 단박에 뛰어넘을 작정이던 담장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무언가 생각난 듯 길동은 천천히 뒤로 돌아선 다음,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았다. 그리고 홍 판서가 잠들어 있을 안채를 향해 큰절을 했다.

   ‘대감마님, 불초소자不肖小子, 이렇게 하직 인사를 올립니다.’

   이마가 땅에 닿기도 전에 눈물이 솟구쳤다. 멸시와 구박으로 점철된 지난 시간들이 길동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쳤다. 주먹으로 얼른 눈가를 훔쳤다. 그때 불현듯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언제 왔는지 홍 판서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늘 그렇듯 대감은 인자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대, 대감마님.”

   난데없는 대면對面에 깜짝 놀란 길동은 여전히 엎드린 채로 머리를 숙였다.

   “길동아, 삼경三更이 지난 야심夜深한 시각에 봇짐을 메고 대체 어딜 가려는 게냐?”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홍 판서의 낮고 굵은 음성이 다시 한번 길동에게 닿았다.

   “길동아, 내 너의 근심, 익히 알고 있느니라.”

   “대감마님.”

   뭉클한 것이 가슴 언저리에서부터 차올랐다. 홍 판서가 말을 이었다.

   “제아무리 학문이 훌륭하고 무술이 출중하다 하여도 그것을 능히 발휘할 수 없는 서자의 신분이니, 너의 답답함, 오죽하겠느냐?”

   “대감마님, 참으로 송구하옵니다.”

   “길동아.”

   “네, 대감마님.”

   “내 너의 처지를 측은히 여겨 금일부터 호부호형呼父呼兄을 허許하노니 너는 그리 행하도록 하라.”

   홍 판서의 말에 길동이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렸다.

   “대감의 은혜, 하해河海와 같사오나 아무리 호부호형을 허락하신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소인의 신세, 무엇이 달라진다 하겠사옵니까?”

   “그러니까 길동아. 내가 지금 너에게 호부호형을 허한다 하지 않았느냐.”

   “대감마님, 호부호형을 허락하셔도 소인의 일상에 변화되는 것은 전혀 없사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아니 길동아, 그래서 내가 지금, 너한테 호, 부, 호, 형을 허락한다고, 지, 금, 부, 터!”

   “대감마님, 저의 소원은 오직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형을 형이라……”

   오늘 밤 안으로 쉽게 끝날 대화가 절대 아님을 홍 판서는 그제야 겨우 깨달았다.




   바루罷漏가 울린 지도 한참이나 지났다. 심청의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금방 다녀올 거라던 약속과는 달리 길동이 여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새벽닭이 울 참이었다.

   심청은 문을 살며시 열어 심봉사가 있는 방을 건너다보았다. 개안開眼의 기쁨 때문인지 불을 환하게 밝힌 심봉사의 방에서는 밤새도록 책 읽는 소리가 잠시도 끊이지 않았다. 기모치이이其母治李珥 야매태구다사이野昧苔垢多事李 모자익후업서요毛者益後業西要. 무슨 내용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반복되는 목소리가 잔뜩 흥분된 것으로 보아 상당히 재미있는 책 같았다. 심청은 초조해졌다.

   ‘아버지의 눈을 다시 멀게 해야 되는데, 그래야 내가 왕비가 되는데... 길동 오라버니는 대체 왜 오지 않는 것일까? 그새 다른 여자의 꾐에 넘어간 것일까? 그래, 틀림없어.’

   

   심청은 지난 장날을 떠올렸다. 장터 주막에서 우연히 합석合席하게 된 옆자리의 여인들에게 길동이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그 장면을 심청은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여인들은 대화 중에 서로를 춘향과 향단이라고 불렀다. 모친이 도성都城 안에서 고급 요릿집을 한다는 이야기도 섞였다. 웃음을 흘리며 입가를 슬쩍 가리는 향단의 유혹 기술이 예사 재주가 아님을 심청은 직감했다. 어차피 경쟁자는 일찌감치 싹을 잘라야 한다. 심청은 지체 없이 그날 밤 전우치에게 전갈을 보냈다.


사모하는 우치 오라버니,

피를 묻히는 일이라 오라버니의 손을 좀 빌리려고 해요. 기꺼이 도와주실 거죠? 향단이라는 계집애, 속히 처리 부탁드려요. 그리고 오라버니, 그믐날 밤 물레방앗간에서 만나는 약속, 잊지 않으셨죠?

오라버니의 청淸으로부터.


   역시 미리 손을 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지금 중요한 건 길동의 등장이다. 혼자서라도 작전을 실행해야 하는 건가 심청은 망설여졌다. 오분만 더 기다려보자. 그래도 길동이 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할 수 없이…

   그러던 참에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럼 그렇지. 길동 오라버니가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니지. 심청은 반가운 마음에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달려 나갔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길동 오라…”

   심청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방 앞에 서 있는 것은 길동이 아니라 난데없는 포졸 두 사람이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육모 방망이가 부르르 떨고 있었다.

   “도화동 불언치 길 18, 이 주소가 여기 맞소? 그리고 그대는 이곳에 사는 심청 낭자 맞소?”

   험상궂게 생긴 포졸이 물었다. 억지로 예의를 갖추려는 말투였지만 퉁명스러움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아니, 포졸 나리들께서 이 시간에 저희 집에는 어인 일로…”

   “시끄럽소.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하시오.”

   곁에 섰던 키 작은 포졸이 한걸음 나서면서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어찌 된 일일까? 포졸들이 왜 나를 찾아온 것일까? 심청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우선은 상황 파악을 먼저 해야 했다.

   “그, 그렇사옵니다. 제가 심청이옵니다. 헌데 무슨 일로 저를…”

   심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포졸들이 성큼 다가와 심청의 팔을 낚아챘다.   

   “심청 낭자, 그대를 특수 절도 및 존속 상해 미수 혐의로 체포하는 바이오. 그대는 묵비권을 행사하면 곤장을 처맞을 것이고, 어떤 진술이든 포도청에서 무조건 불리하게 작용할 거요. 그러니 순순히 우리를 따라가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이오.”

   “그, 그게 무슨 말이옵니까, 나리들. 소녀, 황망함에 말을 잇지 못하겠나이다.”

   팔을 부여잡은 포졸들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심청 낭자, 일전에 연흥부燕興夫 대감의 잔칫날에 도우미로 간 사실이 있을 것이오. 그날 오후 연 대감이 박을 탔을 때, 거기서 튀어나온 보석들 몇 개를 낭자가 몰래 훔쳤다는 제보가 있었소.”

   “그런 일, 결코 없나이다.”

   심청은 몸을 비틀어가며 저항했다. 하지만 심청의 항변을 들어줄 자비 따위는 처음부터 없는 듯 보였다.

   “뿐만 아니오. 개안開眼을 한 아버지 심학규 씨를 다시 눈멀게 하려고 홍 판서 댁 자제인 길동 도령과 작당모의를 하였다는 제보도 우리는 이미 입수했소.”

   아뿔싸. 결국 길동, 설마 그 인간이… 하지만 이대로 끌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심청은 다시 한번 발에 힘을 주어 땅을 뻗대었다.

   “모함이옵니다. 소녀, 억울하옵니다. 증거, 증거를 보여 주오소서. 소녀, 학력 위조나 외모 위조 한 번 없이 그저 착하게만 살아왔나이다. 부디 바라옵건대 제보자만이라도 알려 주오소서.”

   제보자란 말을 들은 포졸들이 서로의 눈빛을 읽었다. 험상궂게 생긴 포졸이 심청의 귀에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그리고는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먼 곳에 있지 않아요, 내 곁에 가까이 있어요. 하지만 말할 수 없네요. 그대 제보는 아주..."   

   그때 심봉사의 방문이 탁 하고 닫히는 소리를 냈다. 은연중에 느껴지던 누군가의 시선은 바로 저 방으로부터 발원發源된 것이었다. 그제야 심청은 모든 상황이 파악되었다.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사립문으로 끌려 나가던 심청은 조심스럽게 키가 작은 포졸에게 물었다.

   “나리, 그래도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는 있지 않겠사옵니까?”

   포졸은 아차 싶었다. 아까 심청의 방 앞에서 미란다未亂多 원칙을 고지할 때 한 가지를 빠뜨렸던 것이다. 행여 이것이 나중에 법적인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 그렇소. 당연히 그럴 권리가 있소. 낭자는 누구를 선임할 생각이오?”

   긴장한 포졸이 쓸데없는 질문까지 했다. 심청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문철 변호사이옵니다.”


   여기저기서 새벽닭이 울어대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포도청을 향해 말없이 걸었다. 아까부터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누군가의 시선이 여전히 그들을 뒤쫓고 있음은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계속]



* 개인적인 사정으로 매거진 작당모의를 그만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시작한 글이니 2부라고 하기엔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끝까지 마무리할 생각입니다.

* Image by GRAPOLIO from Naver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