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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Jul 15. 2022

기억 속의 멜로디

오래전 그 날


   끙끙거리며 언덕을 힘겹게 올라온 마을버스는 내리막길로 들어선 다음에야 비로소 제 속력을 냈다. 털털거리는 엔진 소리가 시종일관 귀에 거슬렸던 탓에 차라리 걸어갈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애써 소음을 참았던 것은 혹시라도 목적지를 지나쳐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초행지初行地의 불안 때문이었다.


   “여기서 저 쪽으로 건너가슈. 바로 저기요.”

   고맙다는 말을 미처 하기도 전에 버스 기사는 매정하게 문을 닫았다. 차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로 길 건너편 저만치에 파란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프랑스 빵. 상호商號라기엔 너무나 솔직했다. 그녀의 성격을 쏙 빼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여태 내 안에서 잠자던 기억들마저 하나둘 살아나기 시작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콧잔등에는 땀방울까지 맺혔다. 이런 바보같이… 한 손으로 땀을 지워내며 손에 든 쪽지를 다시금 천천히 펼쳐 보았다.


   ‘무아 마트 하차. 우영 공원 방향 이십 미터. 프랑스 빵’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았다. 주위를 살피며 길을 건넜다.

   가게 앞에 섰다. 언뜻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빵들이 제법 넉넉했다. 창문 너머로 가게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창을 등지고 돌아선 몇몇이 보였다. 손님일 게다. 다시 한번 숨을 고른 다음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딸랑하고 종소리가 났다.

   “어서 오세요. 프랑스 빵입니다.”

   시선을 맞추지도 않은 기계적인 인사말이 먼저 들렸다. 계산대 앞으로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심스럽게 내가 물었다.

   “저, 실례합니다만 혹시 여기에 김… 유진 씨, 계십…”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갑자기 눈앞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오빠, 이거 어때?"

   “벌써 다 그렸어? 어디 보자. 아니 또?”

   그녀가 내민 스케치북에는 촛불이 켜진 식탁 앞에서 가족이 식사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빵 바구니가 넉넉했다.

   “넌 왜 항상 먹는 장면만 그려? 그것도 맨날 빵을 말이야.”

   “난 그게 좋아. 그림만 봐도 배가 부르니까. 내 그림을 보는 누구나 포만감을 느꼈으면 좋겠어. 그리고 밥보다는 빵이 더 멋있잖아? ”

   “그림 그리지 말고 차라리 제과점이나 빵집을 차려. 그래서 빵을 나눠주면 되잖아?”

   “어유, 감정이라고는 완전히 메마른 사람. 보면서 느끼는 그 맛과 먹으면서 느끼는 맛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어? 이런 사람이 어떻게 영화 시나리오를 쓰지?”

   “그래 그래, 알았어. 먹으면서 느낄 수 있는 빵 사러 가자. 처음부터 쉽게 말하면 될 것을…”

   그 말에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난 그게 좋았다.


   대학 1학년 가을에 우리는 처음 만났다. 서양화를 전공하는 여대생과 화려한 데뷔를 꿈꾸는 영화작가 지망생. 어떠한 미래도 보장되어 있지 않은 말 그대로의 지망생에 지나지 않았지만 스스로에게 미완의 대기라는 이름표를 붙였다. 실망과 포기를 반복하는 와중에도 그녀는 언제나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하게 하는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선배의 소개로 만난 후부터 누구나 밟게 되는, 그렇고 그런 연애의 과정을 거친 다음, 매일 저녁 헤어지는 그 순간이 못내 아쉬웠던 우리는 부모님의 반대와는 상관없이 함께 살기 시작했다. 겨울이 시작되는 즈음이었다.


   불을 끄고 잠이 든 시간을 빼면, 그녀는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고 나는 그 옆에서 글을 썼다. 우리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주인아주머니가 하루에도 몇 번씩 손기척을 해야 할 만큼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그런 우리들에게도 일주일에 한 번, 외출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빵을 사러 가는 때였다.


   그날이 되면 그녀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일찍부터 일어나 커피를 내리기 위해 물을 끓였다. 그리고 화장을 시작했다. 특별히 값비싸고 화려한 옷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중 가장 깨끗하고 좋은 옷을 챙겨 입었고, 늘 운동복 차림이었던 내게는 반드시 외출복으로 갈아입을 것을 주문했다.

   준비를 마친 우리는 이른 아침, 제과점 앞에 서서 가게의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제과점 주인은  이상한 눈으로 보곤 했지만 정작 우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제과점에 들어서면 그녀의 표정이 달라졌다. 코를 간지럽히는 빵의 향기에 취한 것인지 빵을 고른다는 핑계로 진열대 앞을 분주하게 오갔다. 더 이상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온몸에 빵 냄새를 두른 다음에야 그녀는 겨우 빵을 골랐다. 그것은 언제나 한 가지였다. 기다란 바게트 빵 두 개.


   “난 바게트 싫어. 딱딱하기만 하고, 이걸 무슨 맛으로 먹니?”

   “오빠, 너무 달달한 맛도 난 싫어. 그렇다고 해서 이게 전혀 밋밋한 건 아니잖아? 오빠도 천천히 입에서 녹여봐. 그럼 맛이 느껴질 거야.”

   “근데 이거 어느 나라 빵이야?”

   “프랑스, 프랑스 빵.”


   일반인들에게는 이름마저 생소했을 바게트를 그녀는 그 시절부터 좋아했다. 양팔 가득 빵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 커피를 내렸다. 갓 내린 커피와 방금 영접해 온 빵의 향기 속에서 각자의 작업은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그런 일상을 좋아했다. 또 그만큼 그녀를 사랑했다. 바게트의 부스러기를 그릇에 따로 옮겨 담으면서 그녀는 가끔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오빠는 바게트 같은 사람이야, 그거 알아?”

   나는 그 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당연히 그랬겠지 하며 누구나 짐작할 법한 유치한 다툼이나 의견 차이, 제삼자의 등장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저 현실이라는 문제에 대해 각자가 냉정하게 생각했던 결과였다. 그날의 헤어짐을 시한부 이별이라 명명할 만큼 서로에게 아쉬움과 미련이 진하게 남았지만 애써 감정을 숨겼다. 나는 서둘러 군 입대를 했다. 첫 휴가를 나왔을 때, 그녀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는 말을 그녀의 학과 친구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더 따뜻한 빵을 그리는 법을 배우고 있어.”


   복학 준비를 하며 시간을 보내던 그 해 가을에 그녀의 편지를 받았다. 주소가 적혀 있었지만 답장을 하지는 않았다. 달리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몇 년이 또 그렇게 지났다. 잦아들어가는 커피 연기처럼 그녀도, 그녀와의 기억도 내 속에서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회사 업무 때문에 예정에 없던 기자 인터뷰를 했고 그것이 방송을 타게 되었다.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으니 술을 사라는 친구들의 농담이 이어지던 즈음이었다. 어떤 시청자가 나를 찾는다는 소식을 담당 기자로부터 전해 들었다. 연락처와 함께 이름을 알려 주었다. 김유진, 그녀였다.


   며칠 동안의 고민 끝에 주말이 되어서야 전달받은 휴대폰 번호로 조심스레 전화를 걸었다. 짧은 신호음이 끝나고 저쪽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네, 김유진입니다.”

   여전히 쾌활하고 명랑한 목소리였다. 반가움과 설렘, 약간의 긴장. 편하게 대하면 된다는 애초의 다짐은 금세 사라졌다. 까닭 없이 당황하는 내 모습이 창피했다.

   오랜만에 연락이 된 사람들이 해야 할 것 같은 의무적인 인사와 질문을 겨우 마친 다음, 에라 모르겠다 내가 가장 묻고 싶었던 말을 꺼내고 말았다.

   “유진아, 혹시… 너… 결혼했니?: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오빠, 그럼 우리 만날까?”




   “김유진 씨요? 어? 우리 집사람인데.”

   집, 사, 람.

   남자는 커튼에 가려진 안쪽을 향해서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여보, 누가 찾아오셨는데? 얼른 나와봐!”

   분주한 듯 그는 서둘러 내 앞을 비껴 지나갔다. 곧 커튼이 천천히 걷혔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오빠.”

   오래전 아침 그녀와 함께 즐겼던, 갓 구워낸 바게트의 향기가 그 순간에 기억났다. 그림자가 이미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오후라는 것쯤은 이미 잊었다. 그저 영원하길 바랐던 아침이었다.

   나를 창가의 테이블로 안내한 그녀는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바쁘겠지. 바쁜 시간일 테니까. 집사람, 집사람.


   알고 싶었던 것들은 전화로 이미 다 물어본 터였다. 그나마 듣지 못했던 답은 이제 내 눈으로 확인을 했다. 탁자에 놓인 애꿎은 화병만 만지작거렸다. 사람들이 드나들 때마다 문에 달린 종이 딸랑딸랑 소리를 냈다. 이젠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일어서고 싶지는 않았다.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내 옆으로 돌아왔다. 빵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두 손이 받치고 있었다.  

   “저, 유진아…”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던 것일까? 그녀는 오래전 그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빠, 이거 지금 막 구운 거야.”

   얼른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와아, 맛있겠는걸?”

   “커피 갖다 줄까? 갓 내린 게 있는데...”

   “그, 그래.”

   순간 그녀의 눈가가 반짝였다. 창으로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은 따뜻했고, 구수한 빵의 향기는 내 몸 안으로 따뜻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 표제 및 본문 중 삽입곡 : 오태호 "기억 속의 멜로디" (오태호 작사, 작곡 1993 E&E Media) 라이선스 Collab Asia Music(Collab Asia 대행)

* The music inserted in the text is linked from YouTube and is not commercially used in any case.

* Image by PublicDomainPictures from Pixabay 

* 이 글은 픽션입니다 (feat. 김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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