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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Jan 13. 2022

불량소녀 심청 (1)

< 작당모의(作黨謀議) 14차 문제(文題): 작당모의 >


   “내 딸 청淸아, 앞 못 보는 늙은 아버지를 돌보느라 혼자서 얼마나 고생이 많니? 어린 너를 두고 먼저 떠난 이 엄마의 죄가 참으로 크구나. 비록 저승에 있지만 한결같이 너를 지킬 것이니, 힘들어도 조금만 참으렴. 이제 곧 좋은 날이 올 거란다.”

   말을 마친 곽 씨 부인郭氏夫人은 서둘러 꽃가마에 올랐다. 그러자 주위에서 돌연 흰 구름이 일더니 금세 가마를 에워쌌다. 심청은 재빨리 손을 뻗어 가마를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꽃가마는 순식간에 하늘로 두둥실 떠오른 다음, 무지개 너머로 곧 사라져 버렸다.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한 심청은 크게 소리쳤다. 

   “어, 어머니. 가지 마세요! 어머니!”


   눈을 떴다. 구멍이 숭숭 뚫린 천장이 보였다. 그 사이로 별이 반짝였다. 온몸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 어렵게 몸을 일으킨 심청은 머리맡에 둔 자리끼를 들이켰다. 초겨울의 한기寒氣 때문에 물에는 살얼음이 얼었다.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고 심청은 혼잣말을 했다.

   “또 꿈이었구나.”

   사립문이 삐그덕 소리를 냈다. 


   심청을 낳은 지 사흘 만에 곽 씨 부인은 눈을 감았다. 그래서 심청은 어머니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최근 계속되는 현몽現夢에, 그녀는 어머니가 정말 자기와 함께 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만큼 꿈은 생생했다.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청아, 내일은 아침 일찍 건넛마을 연흥부燕興夫 댁에 가도록 하렴. 그 집이 박을 탈 것인데 그 속에서 온갖 금은보화가 쏟아져 나올 거야. 그때를 잘 노려서 필요한 것을 챙기면 된단다.”

   꿈에서 깼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그녀는 연흥부의 집을 찾았다. 어머니의 말은 옳았다. 사방으로 튀는 보석들 중 몇 개를 몰래 챙겼다. 돌아오는 길에 그것을 팔아 넉넉히 쌀을 사고, 최신 유행하는 치마저고리도 한 벌 장만했다. 심청은 기분이 좋았다. 그날 밤, 곽 씨 부인이 또 꿈에 나타났다.

   “청아, 내일 우물가에 가면 어떤 여자애가 울고 있을 거야. 너는 미리 두꺼비를 잡아 두었다가 그 애의 밑 빠진 독을 막아주렴. 그러면 너는 큰 상을 받게 될 거야.”

   다음날, 심청이 동네 우물 근처로 갔더니 과연 여자 아이가 울고 있었다. 이름은 콩쥐라고 했다. 얼굴이 꼭 쥐를 닮았다. 심청은 어머니가 말한 대로 밑 빠진 독을 누런 두꺼비로 막아 주었다. 얼마 후 콩쥐는 왕비가 되었다며 그녀에게 큰 상을 보내왔다. 상품은 없고 종이로 된 표창장만 있었기 때문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예견豫見은 무조건 들어맞는다는, 더욱 확고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는 매일 밤 꿈속에서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청아, 어제 꿈에서도 말했지만 며칠 후에 아가씨를 찾는 뱃사람들이 도화동桃花洞에 올 거란다. 너는 쌀 삼백석을 받고 그들을 따라가거라. 그러면 쌀도 생기고 아버지도 눈을 뜰 것이며, 너도 왕비가 될 거야. 꼭 명심해라. 반드시 그 뱃사람들을 따라가야 한다, 알겠지?”

   “네, 어머니.”

   얼마나 생생했던지 꿈속에서도 심청은 큰소리로 대답을 했다. 눈을 떴을 때, 역시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구멍 난 지붕 사이로는 별이 빛났다. 

   옷을 대충 추스른 다음,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아버지 심학규의 코 고는 소리가 문틈 새로 빠져나왔다. 심청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흐음, 내가 결국 왕비가 된다, 그 말이지?” 

   심학규가 잠든 방을 바라보는 심청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다음날, 심청은 점심 나절이 되어서야 밭으로 향할 수 있었다. 심학규의 속옷 빨래가 평소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아버지는 유독 속옷을 자주 갈아입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밭두렁에는 먼저 도착한 사내가 있었다. 익숙한 뒤태였다.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길동 오라버니, 왜 또 울고 있어요?”

   제 이름을 듣자 길동은 주먹으로 쓰윽 눈가를 훔치고는 고개를 돌렸다. 눈두덩이 제법 부었다.

   “내가 우는 이유를 청이 너도 잘 알잖니.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이런 비루한 인생, 더 이상 살아서 뭐하겠어?”

   심청은 길동의 어깨를 다독였다.

   “또 그런다? 오라버니 곁에는 내가 있잖아요.”

   “네가 있으면 뭐하겠니.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데…”

   “그만, 그만. 이제 내가 위로해 줄게요. 이리 와요.”

   심청은 호미와 바구니를 저만치 내던져 버렸다. 길동은 심청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알싸한 분꽃 냄새가 피어났다. 열여섯 심청은 속으로 되뇌었다. 

   ‘아무리 첩의 자식이라지만 그래도 홍 판서 대감의 아들인데, 나중에 한몫은 당연히 보장되겠지? 경국대전 상속편篇이 거짓을 말할 리 없어.’

   장 승상의 수양딸이 되는 것보다는 홍 판서와 길동을 선택하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라며 심청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자신의 옷고름에 길동이 손을 갖다 대는 것도 심청은 모른 척 내버려 두었다. 겨울 한낮인데도 이상하리만치 덥게 느껴졌다.


   심학규는 말벗 없이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비록 앞은 못 보지만 주위가 어두워졌다는 것은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빨래 때문에 평소보다 밭일이 늦을 거라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늦는 경우는 평소에 없었다. 

   배는 고파 뱃가죽은 등에 붙고, 방은 추워 썰렁하고 추녀 밑에서 잠들 새들은 푸드덕 대며 날아드는데, 먼데 있는 절에서 치는 쇠북 소리까지 들리는 바, 청이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심학규는 조바심을 일으키며 사립문을 향해 귀를 바싹 대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병덕 어멈 집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올 걸 그랬다. 질펀하게 몸을 놀려댄 것이 미안해서 차마 밥 타령은 할 수 없었다. 옷매무새를 다듬던 병덕 어멈이, 방문을 나서는 심학규의 엉덩짝을 툭 치며 그랬다. “빈 속에도 변강쇤데, 속이 차면 오죽할까?” 

   심학규는 서둘러 마중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워둔 지팡이 막대로 땅을 더듬거리며 동리 어귀로 나가는데, 개천 비탈 즈음에 이르러서는 발을 그만 삐끗하여 미끄러지더니 데굴데굴 구른 다음, 개천에 풍덩 잠기고야 말았다.


   심청과 길동이 물레방앗간에서 나왔을 때, 이미 초저녁 달이 떴다. 심청은 마음이 급했다. 자신의 삶에 짐이 된다 해도 아버지는 아버지인 것이다. 심학규의 저녁 끼니가 우선은 걱정이 되었다. 공연히 길동에게 심통이 났다.

   “오라버니, 이럴 줄 알았어. 어떡하지, 이렇게 늦었는데?”

   길동이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심청의 입술에 갖다 대었다. 

   “걱정 마. 이제 출발할 테니까, 내 손 꼭 잡으라구.”

   말을 마치기 무섭게 길동은 땅을 박찼다. 그의 발이 돌연 공중에 뜨는 듯했다. 손을 맞잡은 심청도 위로 떠올랐다. 발아래로 보이는 땅이 휙휙 뒤로 지나가기 시작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심청은 생각했다.

   ‘이 오라버니, 아까도 붕 뜨게 하더니 지금도 그러네?’


   두 사람이 도화동에 도착했을 때 마을 사람들 몇몇이 동네 어귀에 있다가, 심청을 보고는 크게 반겼다.

   “아이고, 청아. 하루 종일 어디 갔었니?”

   “소운 아주머니, 무슨 일이세요?”

   “늦도록 네가 오지 않으니 너희 아버지가 마중을 나갔다가 그만 물에 빠지셨단다.”

   “네에? 그래서요, 그래서 저희 아버지는 어떻게 되셨나요?”

   심청의 놀란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곁에 섰던 민현 첨지가 말을 받았다.

   “때마침 개울가를 지나던 몽운사夢雲寺 진샤 스님이 다행히도 너희 아버지를 구했어. 그런데…”

   “그런데라니요? 민현 아저씨, 빨리 말씀해 주세요.”

   “진샤 스님이, 아 글쎄, 공양미 삼백석만 시주하면 너희 아버지가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을 하셨다지 뭐니.”

   삼백석? 심청은 머릿속으로 곽 씨 부인이 꿈속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네, 그래서요, 아저씨. 우리 아버지는 그래서 어떻게 되셨나요? 빨리요.”

   “그 말을 듣고서, 너희 아버지가 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서 그만 눈을 떠버리신 거야!”

   “뭐, 뭐라구요?”

   “얼른 집으로 가 보렴. 너희 아버지, 지금 바느질하고 계신다. 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안 그렇니, 청아?”

   “……”

   “그리고 청아, 내일 수십 명이 넘는 뱃사람들이 우리 마을에 올 거야. 너도 주막에 나와서 일을 거들려무나. 다른 날보다 품삯이 두 배란다. 알겠지?”

   “거 뭐라더라, 아가씨를 돈 주고 사갈 거라 그랬지. 얼마라구?"

   "쌀 삼백석이래, 자그마치 삼백석.”


   심청은 눈앞이 어질 했다. 아버지가 눈을 떴다니? 안 된다. 지금 눈을 뜨면 안 된다. 쌀 삼백 석을 받고 뱃사람들을 따라가야 된다, 그래야만 아버지가 눈을 뜨고 나도 왕비가 된다, 분명히 어머니는 그렇게 현몽하셨다. 그런데 지금 당장 아버지가 눈을 떠 버리면, 아버지만 좋을 뿐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분명 병덕 엄마와 새 살림을 차릴 것이고, 나는 결국 새가 되고 만다.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아버지가 지금 눈을 떠서는 안 된다. 뜰 때 뜨더라도 지금은, 지금은 절대로 안 된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심청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 모습을 본 동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우리 청이가 너무 좋아서, 안 믿어져서 저러는 거야."

   "청아, 이건 꿈이 아니란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다."

   "하늘이 내린 효녀야, 효녀. 대단하다, 대단해.”

   입에 발린 그들의 칭찬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브런치 댓글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청은 문 밖에 서서 담장 너머로 몰래 고개를 들이밀었다. 과연 심학규는 툇마루에 앉아서 책을 펼쳐 놓고 손금을 보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의 말이 맞았다. 아버지는 눈을 뜬 것이다. 심청은 곁에 선 길동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리고 비장하게 말했다.

   “오라버니, 이제 날 좀 도와줘야겠어요.”

   “무, 무엇을 말이냐?”

   길동의 눈이 소 방울만큼 커졌다. 심청은 호흡을 가다듬고 나직이 말했다.

   “아버지의 눈을 다시 멀게 해야겠어요. 나를 도와줄 거죠?”

   길동은 말없이 심청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난 네가 기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심청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전에 보지 못했던 굳은 의지가 스쳤다. 길동도 그런 심청을 보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녀를 도와주겠노라. 

   "오라버니, 오늘 밤 자정에 우리 집으로 와요. 알겠죠?"

   "알았어!"

   달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높게 떠올랐다. 바야흐로 작당作黨의 시간, 모의謀議의 밤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계속]


이번 작당모의 문제文題, '작당모의'는 2부에 걸쳐 연재됩니다. 다음 주 목요일에 2회가 계속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https://brunch.co.kr/@jay147/254



* 한국 고전소설 '심청전' 14페이지의 일부를 본문에서 차용했습니다.

* Image by Nemo_Jo from Pixabay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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