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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Oct 10. 2022

가나다라 #2

가을 이야기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란 말을 맨 처음 한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그 말을 세상에 처음으로 내놓았을 누군가가 가끔은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나름 올 한 해를 열심히 보냈다고 자부하지만 막상 내게 ‘구체적인 수확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물쭈물 대답을 머뭇거리게 될 것 같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곁눈질을 해 보면 모두가 나보다는 한걸음 앞선 것 같고, 제자리라도 감지덕지일 내 위치는 오히려 작년보다 더 뒷걸음질 쳤다는 생각마저 든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이맘때의 사연들 역시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드디어 결실의 계절 가을입니다, 저는 이걸 했구요, 저는 이걸 이뤘네요, 칭찬해 주세요.’ 그저 부럽기만 한 남들의 결과 보고에 매일 뼈가 아프다. 과연 나는 올 한 해 동안 무엇을 이루었을까?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1월부터의 일기장을 펼쳐 놓고 단 하루도 허투루 살지 않았다며 항변하고 싶지만, 구구절절 적혀있는 것들은 그저 변변찮은 과정의 기록일 뿐, 제대로 된 결과물은 없다. 스스로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바르게 살면 된 거지 싶다가도 이건 무슨 70년대 새마을 운동 표어도 아니고, 바르게 사는 것은 누구에게나 기본일 테니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 말고, 남에게 제대로 보여주고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럴듯한 결과물이 없을까 자꾸만 뒤적이게 된다. 하지만 허탈하다.


 사분기가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라고, 남은 시간들을 애써 끌어 모아 날짜 수를 따져보지만 그래 봤자 그 기간 동안에 폼나는 성취물이 나올 여지는 딱히 없어 보인다.


 아버지가 해주신 말씀이 생각난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고. 삼십 대는 시속 삼십 킬로, 사십 대는 사십 킬로, 오십 대는 당연히… 하지만 체감하는 일상의 속도는 그것보다 훨씬 더 빠른 것 같다. 호랑이 해가 밝았다며, 호랑이처럼 세상을 호령하며 살자고 덕담을 나누던 것이 엊그제인데 벌써 시월 하고도 중순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시간 참 빠르다. 더 부지런히 살아야 하는데...


 자꾸만 의기소침해지고 자신감을 잃는 것 같다며 친구 윤철이는 안주 대신 소주잔만 연거푸 비워댔다. 짐짓 아닌 척했지만, 나 역시 윤철이와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우리가 치르고 있는 인생 시험은 문제의 순서만 다를 뿐, 결국엔 같은 과목이기 때문이다.


 차의 배기량, 집의 평수, 연금 적립액, 주식 보유액, 그것들의 변화가 내가 이룬 결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친구보다 더 가지게 되었다면 열심히 산 것이고, 아무리 최선을 다했어도 기준치에 미치지 못하면 대충 산 것이 되는 걸까? 아둔한 나로서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겠다.  


 카페의 구석자리에 앉아 일찌감치 올해를 정리해 본다. 원하지 않았던 상처가 유난히 많았던 시간들이었다. 친구와 지인들의 격려가 아니었다면 결코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래서 반드시 좋은 마무리를 해야 한다.


 타이트한 계획을 다시 짰다. 시월이 이십여 일 남았고 거기다 십일월과 십이월을 모두 더하면 대략 팔십일 정도가 남은 셈이다. 바보는 늘 계획만 짠다는데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바보 소리조차도 못 들을 거라며 스스로를 격려한다. 다이어리에 죽죽 그어지는 빨간 줄은 연초에 세웠던 계획들이다. 남은 시험이라도 잘 치면, 적어도 평균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다.


 파이팅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파이팅이다.


 하루하루가 아쉽다. 그러나 후회는 절대 하지 말고 반성은 이미 충분하다. 남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다시 한번 열심히 달려보기로 한다. 늦었다 하더라도 아직은 가을이니까 말이다.




Image by 二 盧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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