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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II제이 Nov 05. 2024

스스로 신이 되려는 피조물을 보는 신의 마음은...

(24년 11월 상순의 순간) 

얼마 전 GPT와 AI툴 관련 연수를 들었다. AI는 인공지능이라는 걸 대부분 알지만 GPT가 무슨 뜻인지는 아직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OpenAI의 챗GPT가 강렬하게 인식되어 인공지능 대화창 정도로 아는 사람이 많아 보인다. “GPT(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는 미국의 인공지능 단체 오픈AI가 2018년 선보인 대형 언어 모델(LLM)의 계열이며 GPT 모델들은 레이블링 되지 않은 대량의 텍스트 데이터셋으로 미리 훈련되고 인간과 같은 문자를 생성할 수 있는 변환기 아키텍처에 기반한 인공 신경망이다.”(위키백과 GPT항목 발췌) 인터넷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자 데이터를 바탕으로 훈련을 하여 인간이 사용하는 문자를 생성하는 인공지능인 것이다.


연수중 기억에 남는 것은 ‘suno’라는 음악을 만들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챗GPT로 가사를 만들고 그걸 ‘suno’에 입력한 후, 몇 가지 키워드를 더 입력해 처리해 주면 노래 하나가 20초 만에 만들어져서 나온다. 다른 한편, 얼마 전 Adobe에서 AI를 활용한 툴 하나를 공개한 것이 충격이었는데, 평면 그림을 그려놓고 그림에 대해 클릭 한 번으로 프로그램 처리를 하면 그 그림에 대해 360도 어느 방향으로도 회전된 모습을 바로 구현하게 할 수 있는 툴이었다. 앞으로 가수와 만화가가 없어질 것이라는 예상은 성급해 보이지만 적어도 보조적 역할을 하는 소위 어시(어시스턴트)들은 일자를 잃어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시쳇말로 노가다는 기계가 대체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 바둑기사 이세돌이 알파고와 대결 후 은퇴한 일이 있다. 그때 이세돌 기사의 인터뷰 중에서 이제는 사람이 AI에게 바둑을 배운다고, 또한 AI가 어느 순간 왜 AI가 두는 수에 대해서 사람이 알 수 없다고 했던 내용이 기억난다. 바둑뿐 아니라 앞으로는 음악, 미술, 글쓰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람이 AI를 통해 학습을 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지금은 AI가 인간의 텍스트를 학습하는 시기이지만 머지않아 역전될 것이다. AI가 만들어낸 결과물을 보며 더 나은 방법을 습득하는 인간들이 많아질 것이다. 인간의 창의성을 가둘 수 없겠지만, 인간-AI-인간의 학습의 순환고리 안에서 창의성이 위축될 확률이 커 보인다. 상하위의 전체적인 평균은 높아지고 분산 정도로 적어지겠지만 최상위의 어떤 창의성의 발현 가능성은 낮아지는 게 아닐까.


젊음을 유지한 채 죽지 않고 끊임없이 학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서서히 시간을 뛰어넘어 영재에서 천재로, 천재에서 신적인 존재로 발돋움해 나갈 것이다. 아직 학습이 짧을 때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순간 그가 눈에 띌 것이고 더 나아가 그에게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모두가 언젠가 죽기에 신이 될 수 없다. 명멸하는 빛들 사이에서 유난히 밝은 빛으로 기록되는 천재의 역사는 그래서 의미가 있다. 한계가 있기에 가치가 높아진다. 그런데 AI는 죽지 않는다. 결국은 AI가 인류의 스승을 넘어, 신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그래서 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신을 뛰어넘는 새로운 신의 출현을 인류는 목격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그러나, 쉽게 답을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신을 뛰어넘기는커녕, 신의 수준에 근접한 인간조차도 아직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을(혹은 인간세계를) 학습한 AI가 인류를 넘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신의 영역에 도전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장인이 되기 위해서는 장인에게 배워야 하고 신이 되기 위해서는 신에게 배워야 할 테니 말이다. 


또한, AI는 자신이 가진 몸, 즉 물질성이 없거나 아직은 불완전하고 제약이 많다. 관념적으로는 인간은 신을 ‘이해’한다. 그러나 신처럼 살 수 없다. 가장 큰 이유는 몸을 가졌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로부터 육체적 관계성 혹은 정신을 지배하는 몸의 물질성은 인간을 인간에 머물게 하지만 반대로 신을 신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데 역할을 하는 도구 같은 것이기도 하다. 한계가 그 이상에 대한 절감을 가져올 때가 있지 않은가? 축구스타 메시의 플레이는 어느 정도 축구를 할 줄 아는 사람에게 더 대단해 보이듯이 말이다. AI가 신을 직접 학습할 수는 당연히 없거니와 인간세계를 통해 신을 학습하려 해도, 신을 더 온전히 학습할 수 있는 학습의 도구 중 하나인 ‘몸의 물질적 한계’가 AI에게는 없지 않은가. 역설적으로 그래서 AI는 신에 닿기 힘들 것이다.  


AI를 통해 학습을 하는 인간의 출현은 벌써 시작되었고, 머지않아 일반화될 것 같다. 어떤 의미로서 위대한 스승의 반열에 AI가 올라설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이상으로 AI가 도달할 수 있을까. 그러길 바라는 마음과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두 갈래다. 기독교에서 가장 큰 죄악은 스스로 신이 되려는 오만함이다. 인간의 스승을 넘어서 그 이상의 영역까지 도달할지 모르는 AI를 보는 인간의 마음은, 어쩌면 스스로 신이 되려는 피조물을 보는 신의 마음과 비슷하게 연민과 분노가 섞인 그런 마음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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