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6월 상순의 순간)
지난 주 일주일은
4살짜리 막내와 둘이 보냈다.
이것저것 해도해도
심심해하는 아이를 데리고
뭘 해야하나 생각하다가
이전에 동네 횟집 수조 앞에서
광어를 보고 신기해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횟집 수조엔
늘 있던 광어와 우럭뿐 아니라
오징어가 눈에 띄었다.
요즘이 산오징어를 주로 먹는 철이라
그런가했다.
검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세모난 지느러미를 흔들며
수조를 떠다니는 산오징어는
내가 봐도 좀 신기한 면이 있었다.
어린아이도 수조에 있는 물것들 중
오징어에 가장 관심이 있었다.
수조 앞에서 이리 저리 왔다갔다하며
한참을 구경했다.
식당 안 그 상 위에 큰 접시로
아무리 희귀하고 맛좋은 회가 담겨 나오더라도
어린아이는 그것에 별 관심이 없다.
살아있는 고기가 아니라
회쳐놓은 살점들에 관심을 가지려면,
적어도 그것을 먹을 줄 알아야 하고,
맛을 알아야 하고,
더해서 그것이 희귀한 고급 횟감 어종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그런 ‘으른’들은 횟집 수조에 물고기를 볼 때도
먹을 일을 미리 생각하며
어종의 특성과 신선도 등을 구분해 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횟집 앞에서
잠시 수조의 고기 상태를 보곤,
곧 식당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을 것이다.
그들에게 고기는 음식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수조에 헤엄치는 산 오징어를 다른 눈으로 본다.
아이는 억지로 식당에 들여보내져
식탁 의자로 가게 될 것이다.
앉아 있다 지루해하면 ‘으른’들이
핑크퐁 상어 영상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아이의 관심은
인공수조에서 헤엄치는 살아있는/곧 죽을
오징어들에게 있을 것이다.
횟집 수조에 있는 물고기들은
이제 곧 회가 되거나 매운탕이 될 운명이다.
그들이 안타까워보인다면
어쩌면 내가 그런 처지와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살면서 그런 생각 한두번 해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 때,
나의 노력은 무력하다는 생각이 들 때,
어차피 나의 미래는 정해져 있다고,
내가 지금 발버둥친다해도
달라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아무리 좋게 봐 주어도 내 생활이
일종의 연극 같은 것에 불과하는 그런 느낌이 들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횟집 수조에 들어있더라도 살아 있을 때,
살아 있어서 살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기름진 살점, 아삭한 식감,
파도를 헤치는 탄력 같은 내적 가능성들이
아무리 충만하더라도,
곧 그것을 취하는 누군가에게
잡아먹힐 운명이라 하더라도,
이미 횟집 수조라는
미래가 정해진 우울한 틀 안에 갇혀 있다 하더라도.
내 생활이 연극 같이 가식적이고,
미래는 암울하고,
해봐도 소용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금까지 없었다면
앞으로 그런 생각을 한번 이상 하게 될 것이다.)
내 주변이, 내가 상대하는 사람들이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부족한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들 때 더 그럴 것이다.
점점 생각이 발전하며 가라앉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이해받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나를 알아주지 못할 것이다.
나의 업은 무의미로 소멸되어버릴 것이다.
무언가를 쌓는다해도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진짜배기들은 저 먼바다에
언제나 어디에나 있고, 있어왔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계속 있어서는
나는 그들처럼 되지 못할 것이다.
시간이 조금만 흘러가도
나는 있었는지조차 기억되지 못할 것이다.
무수히 많아서 세봐야 할 의미조차 없었던,
지나간 자리조차 남지 않은 이들처럼.
존재하지 않으므로
‘허무’라는 이름조차 붙일 데가 없는 그들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횟집 수조 속 물고기라도,
어린아이에겐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어린아이의 눈에는 고기가
횟감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연이기 때문이다.
물고기가 살아있는 자연으로서 존재하는 순간이다.
말하자면, 그 스스로의 본질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곧 잡아먹힐 물고기에게
잔인한 상황인 것이 너무나도 맞지만,
적어도 어린아이 눈에는 그렇지 않다.
자연이 자연으로 존재하는 순간.
지금은 만나기 힘들게 되어버린 찰나의 순간이지만,
분명히 그런 순간은 있다.
자신이 자신의 본질적 존재로 존재할 수 있는지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달려있다는 사실이
슬프고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현실 도피라거나
너무 인간 중심적인 생각이라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산 채로 썰어서 곧 잡아먹을 물고기에게
그의 운명을 인간 중심적인 생각으로
무책임하게 어린아이 핑계를 대며 포장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관점도 소중하다.
그러나 그 물고기가 나라면?
내가 그런 상태라면?
그 물고기나 나나 똑같은 상황이라는 생각에
지금 다른 것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그런 입장이라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규정하는 것이
나 혼자만의 힘으로 가능하던가.
주변의 수많은 시선 중에서,
그 중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선택해 오고는 있지 않았던가?
나의 진가를, 나의 가치를
알아봐줄 누군가가
이 세상에 어딘가엔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믿음은
허황된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은
내가 살아 있어야 존재한다는 점이다.
횟집 수조에까지 몰려 들어와 있어도
여전히 살아 있어서
아이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찰나의 순간이나마 자연 그대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처럼.
횟집 수조에까지 실려 왔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누군가 씹어 즐길만한 어떤 가치 있는 것을
내 안에 가능성으로 내포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라고 한다면
너무 잔인하고 무정한 평가일까.
그렇지만 혹시 또 아는가?
그 어떤 아이가
수조 속 오징어 한마리를 굳이 살려 받아와
부모에게 떼를 써서
산 오징어를 봉지에 싸
사시미칼이 있는 주방이 아니라,
먼 푸른 바다를 향해 가자고,
오징어를 바다에 다시 풀어주자고 하게 될지 어떨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