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지

<탁영가>에 대한 두 가지 해석에 관하여

by 제II제이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를 읽다가

그 작품에 활용된 옛 노래인 <탁영가>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게 되었다.


옛 노래들에는

그 노래보다 더 옛날 노래나,

옛날이야기가 흔히 삽입된다.

많은 말을 하기보다는

유명하여 두루 공유된 옛 노래(옛시)나

옛이야기(고사)를 넣어

간결히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방법이다.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의 경우,

두 수(춘사5, 하사4)에서

탁영가의 모티프가 활용된다 한다.


물결이 흐리거든 발을 씻다 어떠하리
오강에 가자하니 천년노도 슬플로다
초강에 가자하니 어복충혼 낚을셰라 <어부사시사 하사4>


그냥 이렇게만 놓고 보면

무슨 내용인지 알기가 어렵다.

초장(첫 줄)은 <탁영가>의 일부이고,

중장(두 번째 줄)과 종장(세 번째 줄)은

각각 옛 중국에 있었던

오나라 인물 오자서와 초나라 인물 굴원에 관한

옛이야기를 활용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탁영가>와 ‘오자서’, ‘굴원’에 대해서 모른다면,

아예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 된다.

그러나 반대로 안다면,

짧은 글에 풍부한 감정과 생각을 담아 놓은

작품으로 읽히게 된다.

작가가 스스로 옛 고사에 대한 지식을

능란하게 다룰 수 있다는 간접적 뻐김(?!)은 덤이다.




<탁영가>는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을 것이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나의 발을 씻겠다”는 내용의 옛 노래이다.


‘창랑’은 강의 이름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지나가자.

강물이 맑으면

선비의 머리에 쓰는 갓끈을 씻는데 쓰고,

강물이 흐리면

더러운 발을 씻는데 쓴다는 의미이다.


물에 뭘 씻는 일이

대단한 노래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

의아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환경과 그에 따른 대응 및

개인의 선택에 관한 노래,

혹은 인생에 대한 어떤 관점을 담은 노래로

생각할 때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던져주는 노래이다.


옛 선비 들은

나아갈 때와 물러갈 때를

잘 선택하는 처세에

목숨이 달려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가문 전체의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는 일이니만큼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외부세계의 상황 변화에 따라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중요하다.


삶은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며

특별히 나에게 불친절하다.

나는 바로 서 있으려 하는데,

어그러지고 기울어진 세상이

협조하지 않는다.

세상에 손을 댄다는 것은

나도 같이 더러워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손 떼고 어디 산속에 들어가

혼자 살 수도 없다.


이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해봤다면,

당신은 <탁영가>에 대해서도

분명히 할 말이 한마디 이상 있다.




<탁영가>에 대한 설명으로는,

<<맹자>>와 <초사>>라는 책에 실린

해석과 설명이 가장 유명하고 권위 있다.


우선 <<맹자>>에서는

“(갓끈을 씻는 데 쓰이든, 발을 씻는데 쓰이든)

이는 물이 자취(스스로 취함)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어떤 존재의 상태에 따라서

그 존재와 관계하는 다른 대상들이

결정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스스로가 깨끗한 상태여야

좋은 대상과 관계할 수 있다는 그런 뜻이다.

자신을 잘 지키고 성찰하는 자세를

강조하는 해석이다.


그런데 굴원의 <어부사>에 실린 내용은

이와 좀 다른 해석을 하게 된다.

<어부사>에서는

관직에서 쫓겨난 굴원에게

왜 그런 신세가 되었냐고 묻는 어부가 나온다.

굴원은 온 세상이 흐린데

자신만 깨끗하여 추방을 당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어부가 하는 말은

모두가 술에 취한 것 같은 세상에서

왜 혼자만 취하지 않아

스스로 추방을 자처했느냐는 힐난에 가깝다.

굴원은 깨끗한 몸으로 남의 더러운 것을 받느니

깨끗하게 죽는 게 낫다고 대답을 하는데,

이때 어부가 부르며

떠나는 노래가 바로 <탁영가>이다.


<어부사>에서는

간신들에게 모함을 당했던 굴원의 이야기와

<탁영가>가 엮이게 되면서

일반적으로

‘물(시대 상황이나 나와 관계하는 상대방)의

맑음과 흐림에 따라

나의 행동을 결정하면 된다’는 식으로

해석이 된다.

쉽게 말해 세상이 더러운 상황이라면

그 더러움에 맞춰 나의 행동을 해나가면 된다

(발을 씻는데 강물을 사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옛 사대부들은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잘 구별하는 것이 중요했다.

스스로 시대의 흐름을 좌우할 수 있는

계층이라기보다는

시대의 흐름을 타고

무언가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의 흐름까지는 아니더라도

크게는 국가/사회/문화적 흐름,

작게는 내가 속한 조직의 문화나 분위기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때로 내 주변이 나보다 더 깨끗하여

내가 부끄러워질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 나보다 주변이 흐리다고

생각할 때가 많을 것이다.

이해가 안 되는 조직 문화나

불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관행,

혹은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주변 사람들의 말과 행동 때문에

불만이 차오르는 경험을

자주 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글을 읽는 독자께서는

<탁영가>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혹자는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지 않겠느냐고 할 수 있다.

강물이 더러울 때

그 강물을 맑게 바꾸려고 해야 한다거나,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그 강물을 피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반대로 혹자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을 인정해야 한다고,

그래서 적당한 선에서

절충을 찾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강물이 맑다면야 좋겠지만,

흐리다고 해서 아예 버리는 것보다는

적당히 쓸 수 있는 용도를 찾아서

쓰는 것이 이롭다고 말할 수도 있다.


'중간'은

박쥐와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와

실용을 강조하는 지혜자의 이미지를

동시에 갖는다.

그런데,

어쨌든 우리 대부분은 거기에 있지 않은가.

그러니 <탁영가>에 대해서

할 말이 많아지게 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다만, 나는 그 말들이

다른 사람을 향한 것이 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

되기를 바란다는 점에 관련하여,

<창랑가>의 해석들 중에서

당나라 시인인 이백의 시에서

그가 말한 대로

‘빛을 숨길 줄 아는 법’

즉, 세상을 사는 데에

지나친 깨끗함을 꺼리고

유연한 자세로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식의 해석도 있음을

덧붙이고 싶다.


<어부사>의 어부가

죽는 것이 낫겠다는 굴원에게 한 말도

너무 꼿꼿해서 부러져버린 막대기와 같은 굴원에게

지혜로운 자세를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이미 세상적 가치를 대부분 상실한 상황에서

목숨까지 버리려고 하는 굴원의 모습은,

그가 간직하고 있는 어떤 종류의 ‘빛’을

스스로 꺼트리는 일이 아닐까.


자신이

강물을 맑게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현실을 인식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 맞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곧 가치 없는 사람이라는 결론으로

곧바로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유연한 자세’는

흔히 비굴하거나 이기적인,

혹은 교활한 느낌을 가진 말로 이해된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유연함은

자신의 가치를 고수하려는 단호함과 동시에

세상의 부정적 시선을 견뎌야 하는

힘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창랑의 탁한 물일지언정

자신의 발이라도 맑게 유지하는 데

소용시킬 수 있다면,

어쩌면 그가 지키는 자신의 어떤 맑음이

창랑의 탁한 물에 대비되어

더 뚜렷이 보이게 되지 않을까 한다.




아래는 이백의 시이다.


향초에 머리 감고서 갓을 털지 말며
난초에 몸을 씻고서 옷을 털지 말라.
세상을 사는 데에 지나친 깨끗함은 꺼려야 하니
지극한 사람은 빛을 숨길 줄 아는 법.
창랑의 고기 잡는 늙은이여,
나는 그대와 더불어 돌아가려네. (이백 <목욕자>)




참고자료: 하윤섭, <<탁영가>에 대한 해석적 선택지와 유관 시조의 재해석>, 동양고전연구 제87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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