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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재 Dec 18. 2022

가방걸이로 전락한 피아노를 구하라

이게 다 조성진 때문이다


새로운 물건을 구입할 때마다 그 물건이 내 일상을 획기적으로 바꿔줄 거라 내심 기대한다. 구입 후 얼마간은 그 물건이 실제로 그런 효과를 발휘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른 대부분의 물건들이 그듯, 시간이 지날수록 사용 빈도는 점점 줄어들고 우리의 일상은 이전으로 돌아가버린다.


결국 제 쓸모가 아닌 빨래 걸이, 장식품, 심한 경우엔 그저 처치 곤란한 짐짝으로 전락한다. 대부분의 가정에선 러닝머신이 그런 역할을 하지만 내겐 전자 피아노가 그랬다.


피아노를 구입하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그 시기에 난 피아니스트 조성진 님이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에 흠뻑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 곡이 내 감정을 완벽히 이해한다고 생각했고, 그의 연주를 통해 그 어떤 말이나 텍스트보다 더 깊은 정신감응을 느꼈다. 말하기부끄럽지만, 피아노 전공자들도 연주하기 힘들다는 라흐마니노프의 바로  곡을 연주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 무모한 자신감의 근거는 어린 시절 5년간 피아노 학원에 다녔던 경험이었다. 그때 배웠던 것을 모두 잊어버려 악보도 제대로 읽지 못하게 된 처참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자신감만은 20년 전 그대로였다. 언제든 그때처럼 다시 연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피아노를 구입하던 그 순간엔 정말 그럴 수 있을  았다.



우리들의 행복했던 3개월


난 가끔 애정이 가는 사물에 이름을 붙인다. 얼굴이 살짝 일그러져있는 바다거북 인형은 '뱅상', 5년째 키우고 있는 테이블 야자는 '제이드'였다. 전자 키보드에는 '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처음 3개월 간은 믹을 신나게 두드렸다. 유튜브 튜토리얼을 보며 좋아하는 곡을 손에 익혔고, 직접 연주하는 즐거움에 흠뻑 빠졌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밤의 여왕 아리아'나 '엔터테이너'를 신나게 연주하고 나면 답답하던 가슴이 시원해졌다. 멋진 취미가 생겼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피아노 소리를 더욱 풍부하게 해주는 서스테인 페달도 사고, 한밤중에도 연주할 수 있도록 헤드폰도 구입했다. 혹시 건반 사이에 먼지가 들어가진 않을까 싶어 손수 커튼 밑단을 자르고 재봉해 멋진 파란색 덮개도 만들어 입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믹과의 행복한 시간은 채 3개월도 가지 못했다.



이게 다 조성진 때문이야


믹과 내가 멀어진 이유는 내가 너무 성급했기 때문이다. 내 능력에서 벗어나는 어려운 곡을 치려고 했던 게 화근이었다.


사실, 이게 다 조성진 님 때문이다. 어느 날 성진님이 연주하는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영상을 보고 말았다. 그는 그 곡을 너무 아름답게 연주했고, 그 손놀림은 마치 누구라도 칠 수 있을 것처럼 가벼웠다. 그러나 '차피협 1번'은 만만한 곡이 아니었다. 내 알량한 실력은 처음 열 마디를 넘지 못했다. 그저 손가락을 건반 위에 알맞게 올려놓는 것만으로도 손에 쥐가 날 정도였다.


지금 당장 능숙하게 연주하고 싶은 마음에 비해 한마디 한마디 익히는 과정 너무 더뎠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치던 것이 되려 스트레스가 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믹의 전원을 켜고, 그 앞에 앉는 과정조차 귀찮아졌다. 그렇게 점점 믹을 멀리하게 됐고, 키보드 거치대는 가방걸이로 전락했다. 피아노 의자는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있는 것들에 닿기 위한 사다리 겸 보조 의자로 변했다.


그런 믹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실추된 믹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싶었다. 이대로 가다간 라흐마니노프는커녕 젓가락 행진곡도 능숙하게 치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걸작을 그리고 싶다면

먼저 연필과 친해져야 한다


미술학원에 가면 보통 첫 수업은 '연필과 친해지기'다. 새하얀 스케치북이 새까맣게 될 때까지 온통 연필 선으로 가득 채우며 연필의 감각을 손에 익히는 것이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렇게 건반을 손에 익히는 방식을 통해 믹과 다시 친해져 보기로 했다.


비교적 여유로운 아침 일과에  매일 믹과 만나는 스케줄을 끼워 넣기로 했다. 나의 기상 일과인 '기상 - 스트레칭 - 따뜻한 물 한 컵 마시기 - 유산균 섭취 - 세수 - 아침식사'에서 세수와 아침식사 사이에 믹과의 만남을 추가했다. 시간은 따로 정하지 않았다. 1분이든, 10분이든 일단 그저 매일 피아노 의자에 한 번이라도 앉는 것이 목표였다. '나비야 나비야'든, '젓가락 행진곡'이든 단 한곡이라도 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오늘도 딱 한걸음


매일 아침 이렇게 잠깐이라도 스킨십을 하니 믹과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돈독해졌다. 다섯 곡이었던 나의 레퍼토리는 여덟 곡으로 늘었고, 새로운 곡을 익히는 것도 전보다 훨씬 수월해졌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는 시기는 나의 환갑잔치 때로 넉넉하게 잡았다. 대략 25년 정도 남았으니, 25년 동안 매일 한 걸음씩 간다면 못할 리가 없을 것 같다. 오늘 태어난 신생아도 달성할 수 있을 만큼 관대한 목표니까 말이다.


오늘도 믹과 짧은 대화를 나눴고, 어제보다 아주 조금 더 친해졌다. 환갑 때 '라피협 2번'을 치기 위해 오늘 내가 할 일은 이걸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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