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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재 Dec 16. 2022

지네의 딜레마

삶의 모든 것은 '춤'이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들으며 거리를 걸을 때마다 머릿속엔 제대로 된 문장의 형태를 갖추기 전인 태초의 생각들이 머리를 떠돌아다닌다. 그 생각의 '분위기'는 듣고 있던 음악의 분위기에 좌우될 때가 많다. 어느 날은 데페쉬 모드의 'Personal Jesus'를 들으며 걷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내가 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온 거지?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갑자기 삶의 무게가 온몸으로 느껴졌고, 감당할 수 없는 그 모든 것이 한 번에 날 짓눌렀다. 나는 순식간에 실체가 없는 공포에 휩싸였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엄청난 무게를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감이 느껴졌다. 나는 그동안 그 무게를 어떻게 견뎌낸 걸까.



지네의 딜레마


다행히도 난 이것이 내가 판 함정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이런 감정은 처음 겪어본 감정이 아니었고, 사실 이미 꽤나 익숙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순간은 여전히 찾아온다.


이런 현상은 나 혼자만이 느끼는 독특한 경험이 아니다. 누구나 그동안 별생각 없이 해오던 것에 대해 깊이 사유하면 아무 무게도 느껴지지 않던 것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정신의학자 테오 도팻은 이런 행위를 걸음걸이가 좀 이상하지만 걸을 수는 있는 지네에게 "이봐 당신 34번째 왼쪽 다리 움직임이 왜 그래, 이상하잖아"라고 말해서 지네가 지나치게 거기에 신경을 쓰다 더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오히려 발걸음을 더 꼬이게 만드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지네가 수많은 다리를 적시에 움직이며 걷는 것은 우리가 노트북으로 타이핑을 하는 것과 같다. 정확히 어떤 글자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하나하나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손가락은 정확한 키를 단번에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눌러야 할 키를 일일이 생각하면서 타이핑을 하면 손가락은 갑자기 갈 곳을 잃어버린다. 피아노를 칠 때도, 자전거를 탈 때도, 춤을 출 때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춤이다


춤을 출 때, '오른 팔꿈치를 15cm 들어 올리고, 손 끝을 몸 안쪽으로 42도 기울인 상태에서 상체를 시계 방향으로 5m/s의 속도로 틀어...'라고 생각하며 추는 사람이 있을까? 모든 동작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바보 같은 몸짓이 될 뿐이다. 그 몸짓은 더 이상 춤이 아니다. 언어로 정의할 수 없는 춤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능숙하게 춤을 추던 사람도 더 이상 춤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춤을 배우려면 책상에 앉아 춤에 대한 논문을 읽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비우고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여야 한다. 삶의 모든 것은 춤과 같다.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삶에서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것들은 오직 춤을 추는 방식으로만 배울 수 있다. 어떤 노래를 틀 것인지, 어떤 느낌으로 출 것인지를 정했다면, 춤을 추는 순간에는 음악에 몸을 맡겨야 한다.



삶 전체가 아닌 바로 이 순간


세상 모든 것들을 깊게 사유하다 보면 모든 게 버겁게 느껴진다. 어떤 것의 절대적인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어를 통해, 정확하게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혹시 그런 게 존재한다면 우리 삶에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일 가능성이 크다.


내가 앞으로 '이 무거운 삶의 무게를 어떻게 짊어지고 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지네가 34번째 다리를 움직이는 원리'에 대한 질문처럼 쓸모없는 것이다. 애초에 '삶' 자체가 살아간다는 뜻 아닌가. 살아가는 방법은 태어나는 순간 깨우쳤는데 더 이상 뭐가 필요하단 말인가.


감정을 표현하고 음악을 온몸으로 즐기는 진정한 의미의 춤을 배우고 싶다면 오히려 드럼이나 연기를 배우는 편이 낫다. 박자 감각과 표현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으니 말이다. 인생을 '잘' 살기 위해선 삶의 의미나 '인생 전체'를 잘 사는 법이 아닌 책과 음악을 즐기는 법, 요리하는 법, 몸을 돌보는 법, 다시 말해 하루하루를 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오늘 하루에 대한 확신이 있다. 오늘 처리해야 할 일들에 대한 모든 준비가 끝났고, 오늘이 무사히 지나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하루를 나름대로 보람 있게 보낼 수 있다면 나머지 인생도 그렇게 보낼 수 있다. 다시 그 모든 것이 무의 상태로 돌아간듯한 공포에 휩싸이는 순간이 온다면 난 그저 오늘 하루,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하면 된다. 불시에 찾아왔던 그 공포는 불시에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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