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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Nov 09. 2023

딸을 위한 나의 고양이 체험기

Looking together in the same direction

나는 개나 고양이등 애완동물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릴 적 개에게 물린 무서운 경험을 한 탓이 클 것이다.

그들이 멀리 떨어져 있어 그냥 배경에서만 존재하고, 나의 행동반경으로 들어오지 않는 한은 그들에 대한 호불호를 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개나 고양이가 내 생활 반경으로 들어온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물론 애완동물의 유기나 학대에 대한 뉴스 등을 접하면 동물들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유기나 학대를 자행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무책임함과 파렴치함에 화가 난다.  


학창 시절, 일주일에 한 번은 집으로 놀러 가곤 했던 친한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친구 집에 갔더니 고양이가 있었다. 기겁을 하는 나에게 장난을 좋아하던 친구는 고양이를 내 얼굴 앞으로 들이밀며 짓궂게 장난을 쳤다.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날 이후로 그 친구 집을 다시 방문하지 않았다. 그런 장난을 친 친구에게 화가 많이 났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친구에겐 장난이었지만 나에겐 장난이 아닌 공포 그 자체였다.


아이들이 어릴 때 가끔, 개를 키워도 되냐고 물었었다.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아이들도 내가 개를 무서워하는 것을 아니까 더 이상 부탁하지 않았다. 아들이 자라면서 나중에 자기 집을 가지면 개를 키울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럼 난 '아들 집을 가기가 힘들겠구나' 생각했다.  구태여 개와 고양이 중에 어느 하나를 타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길러야 한다면 개를 택하겠다. 예를 들면 개는 묶어 둘 수도 있고 훈련을 시킬 수도 있다. 특히 안내견의 경우는 근처에 있어도 별로 긴장하거나 싫어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안내견을 접할 기회가 없었지만 미국에서는 자주 접하는데, 정말 훈련이 잘 되어있고 주인을 보살피는 그 들을 보면 기특한 느낌까지 든다. 짖지도 위협적이지도 않으며 나에게 함부로 근접하지도 않을 것을 알기에 긴장이 되지 않는다.  어떤 개들은, 사실 사진이나 미디어로 볼 때는 귀엽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개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도 본다. 그러나 아무리 귀엽게 생긴 작은 개라도 미디어가 아닌 실생활에서 자유롭게 내 근처에 있는 것은 감당하기 힘들다.  고양이의 경우는 미디어에서라도 보고  귀엽다고 느낀 적이 없다. 고양이를 보는 것 자체가 편하지 않으니 키우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어릴 때 처음으로 맞닥뜨렸던  검은 고양이의 무서웠던 기억이 너무 강렬했던 탓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지난 크리스마스에 집에 왔던 딸이 고양이를 입양할 것이라고 선언을 했다.  성인이 된 딸이 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에서 자신이 원하는 고양이를 키우는데 내가 가타부타 관여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얼마 후 딸은 암 수 2마리의 고양이를 입양했다(참고로 Humane Society에서 딸이 고양이를 입양할 때 지불한 비용은 한 마리당 $150 정도인데 예방 접종 비용이다). 그중에 암고양이는 인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 인간의 접촉을 거부하고 폐쇄적인 행동을 보이는 고양이다. 이런 고양이 기르기가 힘이 드니 사람들이 입양을 회피하고, 결국 오랫동안 입양이 되지 않고 있었단다.  왜 그런 고양이를 입양했느냐고 했더니 아무도 하지 않아서 자기가 해 주고 싶었단다.  딸아이는 그 고양이를 손으로 잡을 수 조차 없었다. 고양이가 만지는 것을 격렬하게 반항했기 때문이다. 입양하고 한 달이 지난 즈음, 그 고양이가 아파서 딸은 수의사에게 데려가기 위해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사람의 손길을 거부하는 고양이를 잡을 수가 없으니 캐리어에 넣을 수가 없었다. 물론 강제적으로 데려 갈려면 못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고양이에게 공포감을 심어줄 수가 없었던 딸은 결국 몇 시간을 분투하다가 실패하고 약속을 두 번이나 취소했다. 한 번은 딸이랑 통화를 하는 데 딸이 울었단다. 세 번째로 약속을 다시 잡은 날이었는데, 더 이상 약속을 취소할 수도 없고 그날은 정말 데려가야 하는데, 여전히 격렬하게 울며 반항을 하고 할퀴니 막막하고 속이 상해 울었다는 것이다.  딸이 울기까지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는 무척 속이 상했다. 몇 시간 동안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진을 빼고 결국 그날 약속에도 데려갈 수 없었으니 힘들고 지쳤을 것이다.  말썽인 고양이도 못마땅하고 왜 하필 그런 키우기 힘든 고양이를 입양했는지 딸의 선택이 못 마땅하기도 했다. 고양이가 반항하고 무서워한다고 해도 이미 두 번이나 약속을 취소했으면 억지로라도 데려가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딸의 마음이 너무도 이해가 되었다.


나는 딸이 힘든 것이 싫었고 그 상황이 짜증이 났다. 차라리 개를 키우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그 고양이는 그 뒤로도 자주 아팠고 병원에 열흘 간 입원을 하기도 해 입원비로 이백만 원이 넘는 돈을 쓰기도 했다.  6개월이 넘게 극진히 보살폈는데도 여전히 딸이 잡거나 안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딸에게 왜 처음부터 두 마리나 입양을 했느냐고 하니, 낮에 혼자 있으면 외롭기 때문에 두 마리가 있어야 한단다. 그런데 수놈 고양이가 트라우마가 있는 고양이를 계속 공격한다는 것이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들으면 머리가 지끈했다.



더 큰 문제는 이 고양이들 때문에 딸이 두 시간 떨어져 있는 우리를 방문하는 게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전에는 주말이나 휴일등 내킬 때 자유롭게 와서 하루나 며칠을 머물고 갔는데, 이제 이 두 마리의 고양이가 있으니 예전처럼 쉽게 우리를 방문할 수가 없었다. 고양이 두 마리를 우리 집에 데리고 오거나, 아니면  cat sitter를 구해야 하는데 고양이 두 마리를 맡기면 하룻밤에  $150의 비용이 든다.  문제는 두 마리중 그 문제의 트라우마를 가진 고양이가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고 피하기 때문에 cat sitter에게 맡길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두 마리의 고양이를 우리 집에 데려와 있게 한다는 건 나로선 도저히 상상도, 감당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fur 앨러지도 있다.


마음이 우울해졌다. 딸을 집에 와서 쉬게 하고 싶은데 고양이를 집에 들이는 엄청난 일은 상상도 하기 싫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스트레스가 심했다. 건강한 고양이 한 마리만 키웠다면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도 쉽지 않았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고양이 이름은 내가 지어 주었다. 입양을 한 후, 딸이 나에게 부탁을 했었다. 난 사랑이와 장군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사랑이는 트라우마를 가진 암 고양이이고 장군이는 수놈이었다.  이름을 지어준 후 딸이  두 고양이 사진을 찍어 계속 내게 보내주었다. 고양이를 보는 것도 싫어하는데 사진이라고 보고 싶을까.  그러나 딸에게 사진을 보내지 말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사진을 보내며 딸이 귀엽지?라고 하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딸에게는 이 고양이들이 소중한 존재들인데 내가 그들을 싫어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딸에게 물었다. 이렇게 골치 아프고, 돈도  많이 들고 (둘 다 병원을 수시로 간다), 널 힘들게 하고 널 따르지도 않는데, 그래도 이 고양이들을 입양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후회하지 않는단다. 고양이들이 좋단다. 사랑이도 처음에 비해 점점 나아지고 있단다. 나아진 게 그 정도면 처음엔 어땠다는 걸까.  마음이 안 좋지만 딸이 기쁘다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딸을 힘들게 하는 것 말고, 그들이 딸에게 주는 애완동물로서의 혜택이 뭐가 있을까 싶었지만, 딸이 그들을 기뻐한다는데 나도 그들을 긍정적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부담감이 생겼다.   처음에는 쳐다보기가 싫었던 그들의 사진들을 억지로 보면서, 그들에 대한 딸의 애정 어린 이야기를 들으면서, 딸이 고양이들과 찍은 사진을 보면서, 딸이 보내주는 고양이 사진을 보는 것이 조금씩 조금씩 쉬워졌다. 고양이들의 안위가 딸에게 영향을 미치니 고양이들이 어떤지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고양이들 때문에 딸이 집에 오지 않은 지 몇 달이 지났다.  생각을 거듭하다가 결심을 하고 고양이를 데리고 오라고 딸에게 말했다. 나에게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  고양이가 주위에 어슬렁거리면 온몸이 바짝 긴장이 된다. 고양이를 내 집에 머물게 하는 건 끔찍하리만큼 싫지만, 그 마음이 딸을 사랑하는 마음만큼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양이들을 우리 집에서 자유롭게 다니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나는 고양이가 있는 동안 안방에서만 지내야 한다. 1층에 선룸(Sun room)이 있다. 작지 않은 공간이라 그곳에 고양이들을 두기로 했다.  두 쪽의 벽면이 유리로 되어있어 고양이들이 바깥 풍경을 바라볼 수도 있으니 거기가 좋을 것 같았다. 바닥이 카펫으로 되어있으니 물 걸레질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바닥을 커버해야 했다.  고양이들이 예민하다고 해서 살균제를 스프레이 하고 배큠을 몇 번씩이나 했다. 선룸과 거실 사이에 스크린 도어도 설치하고, 가구들도 재배치하고 긁힐 수 있으니 커버해야 하고, 냄새도 배지 않게 공기 청정기도 갖다 두고. 선룸을 고양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준비하는데 며칠이 걸렸다.


드디어 딸이 고양이들과 함께 오는 날,   긴장이 되고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두렵기까지 했다. 딸은 마치 이사를 하는 것처럼 고양이 짐들로 차를 빽빽하게 채워 왔다.   가져온 짐들로 선룸 공간이 가득 찼다. 아이 키우는 것보다 더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짐 꾸리는데만 한참 걸렸을 것 같다. 데리고 오는데 딸이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트라우마 고양이 사랑이를 캐리지에 넣는데만 진을 뺏을 것이다.  그러나 딸의 말대로 딸이 한 선택이니 자꾸 안타까워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난 고양이들이 있는 선룸으로 감히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 갈 생각도 없었다. 유리 너머로 고양이들을 관찰했다. 낯선 공간에 온 것이 불안한지 자꾸 구석으로 숨는다. 남편과 작은 아들이 고양이들이 있는 선룸에 들린 후 피부 트러블이 생겼다. 나는 말할 것도 없으니 결국 앨러지가 없는 큰 아들만 선룸으로 들어가 딸을 도왔다. 냄새에 민감한 나는 근처에 가면 캔푸드 생선 냄새가 나서 역했다. 딸에게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라고 자주 말했다. 말을 하면서도 이런 까다로운 엄마라 미안했다. 그러나 이건 나도 어쩔 수 없다.  딸에게 엄마가 특이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괜찮다고 대답한다.


딸이 사랑하는 대상을 싫어하는 게 점점 미안해졌다. 그래서 고양이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기 위해 큰 마음먹고 먹이 주기를 시도했다. 맨 손을 도저히 입 근처에 갖다 댈 수 없어 면 장갑을 꼈다. 그리고 고양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스낵을 손바닥에 올렸다. 스크린 도어 바닥에 손이 들어갈만한 구멍을 내고, 마스크를 끼고, 잔뜩 긴장한 채로 손만 선룸으로 밀어 넣었다. 장갑을 꼈지만 손을 접촉할까 봐 긴장을 했다.  손을 들이 미니 간식을 입에 물고 가져간다. 고양이가 처음 손바닥에 얼굴을 들이밀 때 흠칫했다. 장갑을 통해서도 감촉이 전해져 왔다.  몇 번을 그렇게 했더니 벌써 학습이 되었는지, 내가 문 근처로 가서 쪼그리고 않으면 간식을 기대하고 다가왔다.  며칠이 지나자  장갑을 낀 손이지만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게 되었다. 나로선 놀라운 발전이었다. 너무 짧은 시간이니 쓰다듬었다기보다 손을 갖다 댄 수준이지만.    내가 고양이를 만지는 날이 오다니!    여전히 장갑을 낀 상태지만 장갑은 도저히 벗을 수가 없다. 나의 마지노선이다.  나의 이러한 변화는, 딸이 그 고양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딸이 그들을 사랑하니 나도 딸을 위해 그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았다.


집에 온 지 며칠, 이번에는 수컷 고양이 장군이가 아팠다.  집에 오기 몇 주 전에도 아파서 병원에 갔다 왔단다.   딸은 사랑이를 집에 두고 두 시간 떨어진 자신의 아파트 근처의 수의사에게 장군이를 데려갔다. 딸이 떠나자 트라우마 고양이 사랑이는 나에게 더 쉽게 다가왔다. 내가 문 근처로 가면 사랑이도 어김없이 문가로 온다.  좋아하는 간식을 주면 등이나 턱을 가볍게 터치하는 것을 허락해 준다.  다음 날 딸이 장군이 약을 처방받고 돌아왔다.    약 먹는 걸 싫어해서 장군이 약을 먹일 때마다 곤욕을 치렀다. 억지로 입을 벌리게 하니 너무도 날카롭게, 마치 표범인양 으르렁거려 긴장이 됐다.  장군이는 색깔도 그렇고 재규어를 연상시킨다.  


가볍게 등이나 턱을 잠시 쓰다듬는 것은 허용하지만 아직도 딸조차 사랑이를 잡거나 들어 올릴 수 없다. 6개월 동안 딸이 그렇게 정성스럽게 돌봤는데도 말이다. 우리 딸이 이렇게 인내심이 있는 아이였나 새삼 느낀다.  


방학이라 열흘쯤 머물다가 딸이 떠나는 날, 가져온 짐을 다시 싸고,  사랑이를 캐리어 안으로 넣는데 또 한차례 소동을 치렀다.  남편까지 합세해서 30분 정도를 씨름한 후, 딸은 겨우 캐리어 안으로 고양이를 넣는 데 성공했다.     차에 짐을 다 싣고 마지막으로 고양이들을 실었는데, 고양이들이 계속 소리를 내며 불편해한다.  2시간을 가야 하니 고양이들이 불편해하는 채로 그냥 출발할 수가 없었던 딸은, 짐을 다 들어내 다시 싣고 고양이들 위치를 이리저리 바꾸는데 시간이 또 한참 걸린다.  그러는 동안, 딸을 배웅하기 위해 우리 식구 모두는 여름 햇빛이 쨍쨍한 드라이브웨이에 한참을 서 있었다.  딸이 마음이 너무 여리고 고양이들에게 너무 휘둘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두 고양이들을 데리고 두 시간 떨어진 우리 집까지 한 번 왔다 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눈으로 확인하자, 딸이 자유롭게 집에 자주 올 수 있었던 옛날이 그립고, 이젠 그런 자유로운 방문이 힘들겠기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딸이 떠나고 오후 내내 고양이들이 열흘 동안 있던 선룸을 청소했다. 스프레이 하고 배큠하고 고양이들이 핥았던 가구들을 닦고 원래대로 배치하고. 딸에게도, 나와 남편에게도 피곤한 일이지만 딸을 위해 감수할 수밖에 없다.  단지 사랑이가 빨리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두 마리 고양이 다 아프지 않고 건강해서 딸이 좀 수월하게 고양이를 기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다음 방문 때는 고양이들에게 좀 더 익숙해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변화는 가능하다. 나 자신도 놀라웠다. 하지만 한계는 존재한다.  사랑하는 딸이 사랑하는 고양이들 한정이다. 일반화는 여전히 불가능할 것같다.


사랑이와 장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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