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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Jan 28. 2023

불행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My 2 Cents on Life

불행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베트남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늦은 밤 출발하는 비행기라  8시경 공항에 가야 했다. 12시에 호텔 체크아웃을  해야 하니 공항에 가기까지 8시간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비가 와서 돌아다니기도 뭐 해서  네일 숍에 가서 시간을 때우기로 결정했다.  호텔 매니저의 동생이 근처에서 네일 숍을 한다고 해서 매니저에게 예약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가게에 도착하니 아직 정식으로 오픈 한건 아니고 인테리어 마무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호텔 매니저의 동생은 30대 초 중반으로 보이는  자그맣고 가녀린 여성이었는데 잘 웃고  인상이 밝아 보였다. 안쪽에는 아들이 식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5 학년이란다. 가게 안쪽 공간에서 주거를 하고 있는 듯했다. 어쨌든 영업은 하고 있다고 해서 자리에 앉아 뭘 할지를 결정한 후  그녀가 매니큐어를 시작했다.  그런데 한 2-3 분 정도가 지났을까? 그녀가 불쑥 남편이  5 개월 전에 죽었다고 말했다. 너무 당황해서 순간적으로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소위 ‘Small Talk’ 이  없이 말 그대로 훅하고 들어온 것이었다. 그때까지 우리가 나눈 대화라고는 어떤 디자인, 어떤 색깔로 할 것인가 하는 그런 사무적인 대화밖에 없었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 I’m so sorry to hear that”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관계에서 달리 해 줄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담담하게 그녀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녀의 남편은 혼자 오랫동안  미국에 가서 일하면서 영주권을 받았단다. 이후 그녀와 아들의 영주권을 신청한 후 인터뷰 날짜를 기다리던 중 남편이 뇌졸중으로  갑자기 미국에서 사망한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 비극적인 경험을 그녀가 너무도 담담하게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하는데 내가 심각하게 조의를 표하는 건 그녀를 다시 그 슬펐던 상태로 회귀시킬 것 같았고, 그런 비극적인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도 것도 그들의 불행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진심을 담아 I am sorry라고 말하는 거였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남편과 미국에서 함께 살게 되었으니 그녀로서는 얼마나 기뻤을까? 부푼 기대와 설렘으로 베트남에서의 살림을 정리하고 있던 와중에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들었으니 그녀가 받았던 충격이 어땠을지 감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청천벽력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 말이겠지. 


할롱베이, 베트남


그녀가  말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너무 아프고 매일 울었다. 그러나 한 달 전부터 기운을 차리고 다시 일을 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남편은 나를 사랑하니까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정리했던 남편 사진들도 다시 꺼내어 여기로 가져왔다. 그렇게 말하면서 남편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남편의 사진들을 정리해서 넣어 두었다가 다시 다 꺼내 놓은 것 같았다. 그녀는 덤덤하게 혹은 가끔씩 미소를 지으며 자신과 남편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 그녀 나름의 방식으로 비극에 대처하고 이겨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아들을 위해서 그녀는 더 이상 아파하고만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좋아할 주제, 그녀의 아들에 관해 묻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똑똑하고 영어도 잘한단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너는 현명하고 강한 사람이다 네겐 사랑하는 아들이 있다. 힘을 내라, 너는 잘하고 있다. 


사실 몇 달 전에 대학교 다닐 때 알던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저녁까지 평상시처럼 있다가 갑자기 쓰러져 그 밤에 떠났단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친구였고 가끔 소식만 전해 듣는 정도였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충격에서 헤어 날 수가 없었다. 마지막 인사도 가족에게 하지 못하고 갑자기 그리  빨리 떠난 친구가 너무도 안타까워서 마음이 아팠다.  또 몇 시간 만에 갑자기 남편과 아빠가 없는 세상에 남겨진 그 친구의 아내와 자녀들의 마음은 어떨까?  그 아내를 직접적으로 알지 못하니 내가 뭐라고 위로를 할 수도 없지만 안다 해도 도대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두어 달이 지난 후 그 부인과 알고 지냈던 내 친구가 하는 말이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싶은데 겁이 나서 못하겠다고 말했다.  어떤 마음으로 무섭다고 말하는지 잘 알 것 같다. 


우리는 비극을 당한 사람을 대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익숙한 일이 아니기에,  우리가 하는 말이 어쭙잖은 위로로 들릴까 봐, 또는 본능적으로 불행의 현장에서, 고통과 슬픔의 현장에서 멀어져 있고 싶은지도 모른다. 일종의 본능적인 방어기작일 수도 있다. 우리가 건네는 말이 걱정의 말이든 격려의 말이든 너무도 조심스럽다. 그들의 고통 앞에 우리의 위로는 너무도 가볍고 형식적으로  느껴진다.   문득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정신없이 치른 장례식이 끝나고  그 많았던 사람들이 다 떠난 후,  일주일 정도 지나면 더 이상 오는 사람도 오는 전화도 뜸해지고 혼자 남겨질 때, 그때부터 비로소 떠난 사람의  부재를 너무도 처절하게 현실로 느끼게 된다고, 그때가 미치도록 견디기가 힘이 들었다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다시 그 글을 생각해 본다. 비극을 겪고 있는 사람 대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겠구나. 나를 혼자 있게 내 버려 달라 밀어내면서도 오히려 다가와 주기를, 옆에 있어주기를 원할지도 모르겠구나. 고통의 옆에 서 있길 두려워하지 말고 따듯한 말 한마디라도 전하려고 노력해야겠다. 나의 마음이 냉랭한 거절로 돌아와도 너를 걱정하고 있다, 고통 중에 있는 너를 잊지 않고 있다는 걸 상대방이 알 수 있게,  마주하기 힘들면  짧은 글이라도 보내야겠다.     


닌빈,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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