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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Jan 29. 2023

부모의 자식 떠나보내기:  마지막
임무

My 2 Cents on Life

떠나보내기: 부모의 마지막 임무떠나보내기: 부모의 마지막 임무

미국을 여행하다 보면 미국 부모들의 대담함(?)에 놀라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치스(Arches) 국립공원에 있는 더블 아치(Double Arch)를 트레킹 할 때였다. 어떤 사람들은 더블 아치의 중간 지점까지만 올라가고, 조금 더 열심인 사람들은 더블 아치 거의 밑에까지 올라간다. 그러나 더블 아치를 통해서 반대편에 있는 전망을 내려다보기 위해선 마지막으로 가파른 바위 벽을 올라가야 한다. 내가 더블 아치를 트레킹 했을 땐 거기까지 올라가는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비가 와서 바위가 많이 미끄러워 오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두 명의 젊은 여성이 시도하다 포기하는 게 보였다. 나도 중간 지점을 지나 두 번째 지점까지 올라갔는데, 마땅히 앉을 곳도 없어 경사진 좁은 공간에서 겨우 두 다리를 지탱하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두 명의 십 대 여자아이들이 그 미끄럽고 가파른 바위 벽을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올라가다가 몇 번이나 미끄러지면서 위태위태하게 계속 올라가는 거다. 그걸 보며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왜냐하면 그녀들의 신발은 하이킹 부츠도 아니고 보통의 가죽 구두로, 바닥에 트랙션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만약에 미끄러져 넘어진다면 밑은 경사진 바위들로 되어있었기에 계속 밑으로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경우 심각한 부상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조심하라고 소리쳤다. 바위가 미끄럽고 너희 신발로는 좀 위험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조금 떨어진 뒤쪽에서 그 아이들의 엄마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 괜찮으니 걱정 말란다. 엄마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자녀들이 관련된 일이면 잘못될 확률이 아무리 낮다고 해도 결과가 심각할 수 있다면 그 위험을 무시하기가 어렵다. 어린 자녀들을 차에 태우고 간다면 절대 과속을 하거나 부주의하게 운전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고 날 확률이 만 분의 일이라도 사고가 일어났을 경우 그 결과는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면 딸들과 싸워서라도 그 가파르고 젖은 바위벽을 구두를 신고 올라가게 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결과는?? 그 소녀들은 미끄러지면서도 결국 그 엄마 말대로 무사히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은 더 위험하니 차마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어 그냥 내려왔다.


미국에서는 주마다 틀리지만 15-16살이 되면 Learner's Permit을 신청할 수 있다. 그 후 일정 연습 기간이 지나면 운전면허증을 신청한다. 큰 아들이 고등학교 다니던 16살 때 운전면허를 따고 혼자 운전을 하기 시작했었다. 이때 내가 아들에게 허용한 최장 운전거리는 고속도로 한 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아들이 고3 때였다. 친구들 4명과 같이 버몬트 주에 있는 친구의 할머니 Lake house로 여행을 간다는 것이었다. 무려 자동차로 9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선뜻 그러라고 할 수가 없었다. 난 아들의 친구를 알지만 그 아이가 어떻게 운전하는지는 알 수 없지 않은가?


고등학생 남학생 자동차 보험료가 지나치게 높은 데는 이유가 있다. 통계적으로 이들이(16-19세 남자 그룹) 교통사고를 가장 많이 내기 때문이다. 2019 년 한 해 동안 무려 2375명의 십 대들이 (13-19세) 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러니 17-18살 된 남자아이들이 9 시간 넘게 운전하고 가는데 어찌 불안하지 않겠나? 그렇다고 다른 친구들 부모는 다 허락하는데 나만 위험하다고 반대하기도 곤란했다. 운전을 하고 가는 아이의 엄마는 어떻게 그걸 허락할 수 있었는지 나로선 따라 하기 힘든 대범함이었다. 그 아이의 엄마는 자신의 아들이 친구들과 9시간 운전하고 가도 문제가 없다고 확신을 하니 허락을 했겠지? 그 엄마가 신중하지 못한 사람은 아니잖아? 스스로를 설득하고, 친구가 운전을 신중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친구가 운전을 할 때 주의를 분산시키는 일을 자제하라고 아들에게 몇 번이나 당부를 한 후에 결국 허락을 했다. 나름대로 용기를 내고 허락했지만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을 때까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부모로서의 할 마지막 책임은 자식을 떠나보내주는 것이고 그걸 하는 게 가장 힘든 일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지금은 막내도 대학생이 되었지만 아직도 난 이 마지막 의무를 잘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실패를 해도 힘든 일이 있어도 자기가 경험해야만 성장할 수 있다고 언젠가 큰 아들이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그것을 왜 모르겠는가?


어떤 실수나 사고들은 수습이 가능하다. 물론 정신적, 물질적, 혹은 다른 종류의 대가를 지불하겠지만 말이다. 이런 사건들은 결과적으로 자녀들에게 값진 교훈을 주고 자녀들을 성장하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결과가 수습이 불가능할 만큼 치명적이고 회복이 불가능한 종류의 실수나 사고들도 있다. 이런 일들이 바로 부모가 무엇보다 염려하는 것이지만 불행히도 부모의 울타리가 아무리 견고하고 높다고 해도 이런 일들을 다 방지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자식은 그 울타리를 결국 떠나야 한다. 그러니 기도하는 심정으로 울타리를 하나씩 허물고 아이들을 울타리 밖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다.


가끔, 나의 신중함이 자식들의 경험을 제한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래서 보통 둘째들이 더 자유롭고 창의적인 성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 자신도 둘째를 키울 때는 첫아이보다 좀 더 대범했던 것 같다. 어느 코미디언이 말한 농담이 생각난다. 자기 부모가 자신을 위해 해 주었던 최고의 선물은 자기를 방치해 두었던 거라고…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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