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잘 쓰고 싶어서 한 자도 못 쓴 적이 있어?

나의 글쓰기에 대하여

by 너굴

인터넷에서 우연히 이런 글을 읽었다.


지하철 선반 위에 책 한 권이 있었는데, 아무도 가지고 내리질 않았다. 누가 두고 내린 책인가 싶어 꺼내 펴보니 첫 장에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이 책은 제 인생을 바꾼 책입니다. 이 책을 읽고 당신의 삶도 바뀌었으면 합니다. 다 읽고 나서 다른 사람을 위해 지하철 선반 위에 다시 놓아주세요.'


그 책은 한비야의 '지도밖으로 행군하라'였다. 글을 읽고 내용이 궁금해서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언론홍보학을 전공하던 나는 우리 과에서 유일하게 아동학을 복수전공한 학생이 되었다. 부드럽고도 강인한(외유내강!) 글에 끌려 나도 곧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해 지도밖으로 행군할 기세였다.


이후 '그건 사랑이었네'를 읽으며 한비야 작가의 글을 좋아하게 되었다. 오지에서 구호활동을 하는 열정과 함께 현장을 생생하게 전하는 글을 닮고 싶었다. 나는 이 책에서 (흔히 말한다는) 글쓰기의 3대 기초를 처음 접했다.


다독, 다작, 다상량.


내가 자신 있는 것은 다상량뿐이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생각의 품질은 보증할 수 없었다. 실행력이 떨어지는 나는 얼마 못가 시들해졌다. 선택받은 특별한 사람만이 생업의 현장을 글로 옮겨 베스트셀러가 되고 타인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는 생각이 잠시 불붙은 내 열정에 물을 끼얹었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복수전공의 끝은 야무지게 맺고 싶어 보육실습을 마치고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래서 시작이 반이라고 하나보다. 그리고는 혼자, 조용히 훗날을 기약했다.


"언젠가 전문성을 가지고 나눔의 삶을 사는 멋진 어른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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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가 된 에세이를 읽다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한 사람에게 찾아온 수많은 기회가 베스트셀러 작가를 만들어 냈다는 생각. 이런 기회는 아무에게나 찾아오지 않는다는 생각. 특히 나처럼 평범한 사람에게는.


어린 시절 특별한 에피소드가 현재의 빛나는 자신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에는 이제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과거가 아쉬웠고, 기회는 준비된 사람만이 잡을 수 있다는 말은 너무 냉정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꽤나 많은 기회가 있었다. 놓쳐버린 기회도 있겠지만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지금의 나를 만든 모든 과정이 기회였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어려웠고, 내 가치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래서 노력했고, 배워갔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산학생으로 2개월 간 일했던 기독교 방송국에서 나는 글쓰기와 전혀 관련이 없는 부서에 배치됐다. 지원했던 부서도 아니었다. 어느 날, 부장님께서 앞으로 사회에 나갔을 때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셨고 나는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사실 원했던 부서가 이곳은 아니었노라고 대답했다. 소심한 내가 하기에는 굉장히 용기가 필요한 말이었다.


라디오 아나운서로 방송을 진행하고 계셨던 부장님의 배려로 나에게 청취자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라디오 스팟광고 대본을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얼굴도 모르는 나에게 청취자분은 전화로 삶의 깊은 부분을 나눠주셨고, 나는 그분의 삶을 1인칭 대본으로 작성했다. 퇴근 후 카페에서 글을 정리하면서 '앞으로 내가 하게 될 일도 이런 보람과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일이었으면'하고 생각했다. 졸업을 앞두고 안정을 추구해왔는데, 학생 신분의 끝자락에서 글로 칭찬받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가끔씩 내가 쓴 글에 대한 지적을 받을 때면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그래, 그냥 취미로만 할 거야'하고 토라졌다. 생업으론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글쓰기 과제를 해야하는데 너무 잘하고 싶어서, 한 자도 못 쓴 날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포기하려고 하면 이따금씩 일어나는 자그마한 사건들이 다시 글을 쓰게 해주었다. 그냥 다시 글을 쓰고 싶을 때마다 꺼내는 내 핑계인지 모르겠지만.


글은 쓰기 시작했으니 이제 아프리카만 가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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