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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werzdx Jan 08. 2021

일상적인 삶

이사일기(2010-2020) - 10. 합정동 (2020.07)

특별해보일 수 있는 시간들


   고등학교 때 뭣도 모르고 그저 선생님이 좋아서 문학 동아리에 들었었다. 나름대로 소설을 쓴다고 깔짝깔짝 해봤으나 그저 한낱 어린시절의 꿈 또는 이야기였을 뿐.


   문학 동아리에서는 책을 선정해서 읽고 토론을 했다. 고등학생들의 수준이었으니 제대로 된 토론까지는 아니고, 그저 책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보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담당 선생님께서 이따금씩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선생님 역시 우리를 바로잡으려 하시지는 않았다. 나는 사실 그저 책을 접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좋았을 뿐.


   그 시절 우리가 함께 읽었던 책 중에 장 그르니에의 '섬'이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참 많고, 저마다의 서평 내지는 후기도 참 많은 책.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그 책을 열 번은 더 읽었지만 여전히 나는 느낌으로만 좋아하는 책이다. 좋아하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여전히.


   오늘, 100일 연속 글쓰기 프로젝트의 마지막 글 제목으로 선택한 것은 '일상적인 삶'. 장 그르니에의 책 제목이다.


   그의 책 중에 나는 섬, 일상적인 삶, 어느 개의 죽음 등을 구매했었는데, 제대로 이해하고 읽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 중에 그나마 조금이라도 기억나는 건 '섬' 뿐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글의 제목을 '일상적인 삶'으로 지었다. 나의 하루. 일상적인 삶. 그 누구의 것과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보잘 것 없지만, 역시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나 자신의 것. 10년 간 열 곳의 집에 살았던 기록을 적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겠는가. 남루하지만 특별해보일 수도 있는 시간들. 나는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이전에도 밝혔지만 10년 아니 11년 간의 내 이사 이야기를 기록하기로 마음 먹은 건 오래 전이었다.


   사람들은 높은 연봉을 받고 착실히 저축하거나, 투자의 귀재가 되어 주식이나 부동산에 몰두하거나, 재정적으로 여유 많은 누군가와 특별한 사이가 되거나 하면서 저마다 돈을 모으기 위해 몰두했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재주도 관심도 없으므로 나이 먹어도 내 능력으로 나 한 사람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나만의 컨텐츠를 만들어나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것저것 파보았으나 신통한 것은 없었다. 글쓰기도 물론 해결책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100일 연속 글쓰기 프로젝트를 통해 일단 나 자신을 시험하고 싶었고, 그 첫 번째 목표는 달성했다.



나의 목표


   오늘 그리고 이전에도 때때로 행복주택이나 청년주택 같은 이벤트에 가끔 지원했다. 소개되는 번듯한 집들은 지금껏 내가 살아왔던 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보이는 곳이니.


   하지만 돌아돌아 생각해보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 가장 좋다. 오죽 성심성의껏 고른 집이던가? 동네의 느낌과 입지, 집 넓이와 방 갯수, 집주인 분의 성향, 전세자금 대출 가능 여부, 재계약의 가능성 및 여부 등등 수많은 절차를 거처서 구한 집.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곳, 좋아하는 동네에 2년간 살 권리가 있는 내 집이 있다. 내가 매일 자고 일어나는 곳. 가끔씩 느슨하고 좋은 관계의 누군가를 만날 수도 있고, 재미 있는 것들을 상상해볼 수도 있는 곳.


   지방 출신인 사람이지만 내가 유일하게 소속감을 가질 수 있는 곳, 언제까지도 그렇고 싶은 동네. 가까운 혹은 먼 미래에 어떻게 되버릴 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괜찮은 동네. 어디든 내 집이라 여기고 계속 머무를 곳은 없지만 이런 곳이 있어 다행이다.



여행이란


여행이란, 리트레 사전에 따르면 '어떤 곳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 이르기 위하여 옮겨가는 과정'이다. 여기서 '위하여'라는 말을 강조해야 한다. 여행은 의도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도달해야 할 목표가 주된 것이며 그 수단은 부차적이다. 수단은 그것이 목적지에 닿게 해줄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의 이동이 바로 여행이니만큼 중요한 것은 목적지이다. <일상적인 삶> - 장 그르니에 -


   내게 있어서 이사란,

   2010년부터 2020년까지 열 곳의 집에 살았던 지난한 과정이었다. 올해 마흔 살이 된 지금까지 해외여행은 겨우 두 번 해봤는데, 서울 올라온 뒤 이사만 열 두 번을 했다(지방에 오간 것 포함). 장 그르니에가 말하는 리트레 사전에서의 '여행'이 '어떤 곳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 이르기 위하여 옮겨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나에겐 이사가 그와 비슷한 여정이었다.


   이번 집은 여름에 너무 덥고 겨울에 너무 추운 것이 문제여서 더 나은 곳에서 살기 '위하여' 옮겼고, 다음엔 한낮에도 햇빛이 한 줌도 들어오지 않아 더 밝은 곳에서 살기 '위하여' 옮겼으며, 다음 집은..


   누구보다도 일상적인 삶, 일상적인 날들이었다. 누군가와도 바꿀 수 없고,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도 없는 이야기와 기록들이 내겐 남았다. 그리고 기록해 보았다.


   글의 좋음과 번지르르함을 떠나서 성실한 기록. 100일 동안의 시간을 이렇게 보냈다. 내게 의무감을 준 이 시간들에 감사하면서, 나는 이 기록들을 다듬어 더 나은 무언가를 만드려 시도할 것인지, 그냥 이대로 묻어두고 다른 더 좋은 것을 할지 결정할 것이다.


  당장 내일은 이것을 할 의무가 없어졌다는 것이 억지로 머리를 쥐어짜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는 좋지만, 조금 힘빠지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생산적이고 자발적인 의무감을 만들어나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이 마흔 살이나 먹어서 이런 것에 의존하는 나 자신이 조금 한심하기도 하고. 여하튼 나는 한동안은 이집에서 즐겁고, 안전하고, 보람차게 잘 살 것이다. 안녕.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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