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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혁재 Jun 17. 2020

실리콘밸리가 요구하는 영어 수준


우리 회사는 회의가 많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그리고 재택근무라서 더더욱 그런 줄 알았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이곳 미국은 아직 오피스로 직접 출근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서로 얼굴 보지 않고 업무를 하려니 조그만 문제도 화상회의를 잡고 웹캠을 켜야만 의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회의가 많을 거라 짐작했다. 그런데 Youtube에서 여름 인턴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그런 게 아니었다. 미국 회사, 다른 업계는 모르지만 적어도 미국 IT회사는 원래 회의가 많다고 한다. 자기도 매일 최소 3개의 미팅이 잡혀있다고 한다. 보통 30-60분씩 회의하는 게 보통이니 이것만 2-3시간이다. 그나마 띄엄띄엄 잡혀있으면 그 사이 다른 업무에도 100% 집중하기 어렵다. Microsoft, Amazon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하루 업무시간을 8시간이라고 할 때, 회의에만 매일 3시간을 써버리면 개인적으로 업무 처리할 시간은 5시간도 안 된다. 이 시간에 모든 업무 처리가 가능할까? 가능하니까 굴러가는 게 회사겠지 싶긴 하다. 모두가 회의에 엄청난 시간을 쓰더라도 잦은 야근 없이 돌아가도록 충분한 인력(시스템)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회사 파이낸스(재무/회계) 조직에는 사람이 심하게 많다. 1천 명이 조금 넘는 인원이 오직 재무/회계 기능만을 위해 일하고 있다. 회사 전체 인원이 1만 명이 조금 넘으니 약 10%다. 다른 테크 회사를 다녀보지 않아서 비교하긴 어려워도, 분명 적지 않은 규모다. 이 사람들 연봉만 다 합쳐도 도대체 얼마인가.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느끼는 거지만 미국 사람들이 특출 나게 효율성이 높은 게 아니라 사람이 충분히 많아서 야근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사람을 이렇게 많이 쓸 수 있는 건, 판매 마진이 높기 때문이고, 이는 회사가 창출하는 부가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회의가 많다 보니 미국에서는 소통 능력이 항상 강조된다. 그것도 아주 많이. 혼자 일을 잘해도 자기 일을 그럴듯하게 선보이지 못하면 합당한 인정을 받기 어려운 구조다. 적극적으로 스스로 마케팅하지 않으면 투명인간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요즘처럼 모두 재택근무하는 환경에서는 더더욱. 단순히 자기를 뽐내기 위해 소통을 잘해야 하는 건 아니다. ‘역할 조직’으로 불리기도 하는 수평적인 조직에서는 직급에 상관없이 모두가 자기 일에 책임을 진다. 오너쉽이라고 한다. 직급이 사원이던 대리던 상관없이 그 사람 일은 그 사람이 제일 전문가이므로 모두가 그 사람에게 설명을 요구하고 질문을 던진다. 때문에 자기 담당 프로세스나 결과물을 조리 있게 잘 설명하는 게 중요하다. 일은 대리가 하고 발표나 보고는 차장이 하는 시스템이 아니라는 얘기다. 잘 설명하지 못하는 건 잘 알지 못하는 것과 동등하게 여겨질 수 있다.


결국 나 같은 외국인 노동자에게 소통 능력이란 기본적으로 영어 수준이다. 얼마나 원하는 말을 조리 있고 유창하게 영어로 풀어놓을 수 있느냐가 출발점이다. 논리력이나 발표력도 중요하지만 영어 때문에 상대가 못 알아듣거나 오해하면 아무 소용없으니. 아직 업무 시작 2주밖에 안 지나서 나는 매일 어버버 거리고 있다. 비즈니스 영어라고 딱히 특별할 건 없지만, 회사 업무 환경에서 영어로 대화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직 익숙지 않다. 무엇보다 아직 자신감이 덜 올라왔다. 와중에 또 영어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은 잠깐이지만 정말 좌절스럽다. 대체 왜 영어 실력은 이렇게 매일 들쭉날쭉하는 것일까?


진짜 문제는 내 영어실력이 아니라 자신감이다. 이미 학교든 회사든 문제없이 살아갈 수준은 된다. 자신감을 높일 연습이 필요할 뿐이다. 위로가 되는 건 우리 회사에 외국인이 아주 많다는 점이다. 대부분 중국계와 인도계인데 이 중 상당수 사람들 영어 실력이 딱 나 정도다. 가끔 어색하거나 틀린 표현을 쓰지만 소통에 문제 될 정도는 아니다. 가끔 영어가 아주 알아듣기 어려운 사람도 있긴 하다. 그런 사람과 말하고 나면 내심 영어 자신감이 치솟기도 한다. 결국 영어가 부족해서 소통이 안 된다는 건 핑계다. 나보다 영어를 못 하면서 좋은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직원들이 미국엔 많다.


결론적으로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잘하지 않아도 미국 회사에서, 실리콘밸리에서 일할 수 있다. 원어민보다 뭔가 다른 걸 잘하면 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잘 살고 있다. 혹시 실리콘밸리에서 일해보고 싶은데 자기 영어 실력 때문에 용기가 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영어는 중요하고, 더 잘하면 당연히 좋지만, 영어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는 말라고. 애초에 영어 때문에 포기할 일이었다면 별로 간절히 안 원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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