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은 자기부정이 아니라 자기인정에서 출발한다
오늘은 MBA 2학년 수강신청 마감일이다. 벌써 2학년 수강신청을 하고 있다니. 언제나 그렇지만 미국에서 보낸 지난 1년은 참 빨리 지나갔다. 꿈에 그리던 미국 MBA에 발을 들여놨고, 딸아이를 낳고, 미국 테크 회사에서 인턴쉽도 시작했다. 영어는 늘긴 했지만 역시나 원하는 만큼은 아니다. 언제쯤 스스로 만족스러울 만큼 영어가 될지는 미지수다. 영어를 모국어로 구사할 내 딸아이가 내 영어실력 향상의 마지막 희망이다.
버지니아의 여름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1년 전 여기에 도착했을 때, 식당에 가도 마트에 가도 나와 내 아내만 동양인이라는 사실에 놀라곤 했었다. 방학기간이 끝나고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오면서 동양인들이 더 자주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어디에서도 이방인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절했다. 특히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이나 교수님들은 대부분 정도 많고 착한 사람들이었다. 뉴욕이나 캘리포니아처럼 더 다양성이 높은 곳으로 학교를 갔다면 몸도 마음도 더 편하긴 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곳 버지니아대학교 다든 MBA를 택한 것에 이제껏 후회는 한 번도 없었다.
MBA 1학년이 내게 가르쳐준 첫 번째 레슨은 ‘나’에 대한 것이다. 내가 누군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지를 배웠다. 평균적인 MBA 학생들은 성격적으로 나와 많이, 많이 멀다. 적어도 ‘평균적으로’는 말이다. 훨씬 사교적이고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사람들이다. 나 같은 내향인이 어울릴 자리는 별로 없어 보였다. 날마다 파티가 이어지고 사교활동이 벌어져도 나는 거기 스며들 수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그런 걸 즐기지 않는(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걸 고쳐야 하는 하나의 문제로 접근해서 스트레스가 많았다. ‘나중에 리더로서 성공하려면 이런 내 성격의 약점을 극복하고 변화해야 해’라는 마음이었다. 물론 그게 맘처럼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몇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런 내적인 갈등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건 학교 테라피스트였다. 미국의 많은 회사들이나 학교들은 전담 테라피스트(상담사)를 고용해 상주시키는데, 어떤 고민이든 약속을 잡아 상담할 수 있다. 미국 사람들은 자기의 우울증이나 사소한 성격적인 약점 같은 것들에 솔직하고 그것들을 스스로 잘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 상담사를 많이 찾아 필요한 도움을 구한다.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나도 미드에서나 보던 테라피스트 상담을 한 번 해보고 싶었고, 한 번 받아본 상담은 그 후 2-3개월 간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내성적인 성향은 바꿔야 할 대상도 아니고 또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내향인인 나를 그대로 인정하고 그 대신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스킬(기교)들을 익혀서 살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 방법밖에 없단다. 즉 나를 바꾸는 게 아니라 나한테 필요한 무기를 찾아서 장착하는 것이다. 또는 보완적인 파트너를 옆에 두는 것도 좋다. 뭐든 배울 수 있다는 ‘성장 마인드셋’과 바꿀 수 없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이렇게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걸 배웠다. 성장은 자기부정이 아니라 자기인정에서 출발하는 게 아닐까 지금은 생각하고 있다. 비즈니스 스쿨에 와서 처음 배운 게 이거라니.
커버 이미지: Photo by Debby Hudson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