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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혁재 Aug 18. 2020

오빤 한량이잖아

놀면서 성과를 내는 방법

오빤 한량이잖아


이런. 기껏 물어봤더니 고작 한량이라니. 내가 아내에게 "내가 뭘 제일 잘하는 것 같아? 내가 뭘 할 때 제일 행복해 보여?"하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다(네이버 국어사전에 의하면 한량의 뜻은 '일정한 일 없이 놀고먹던 양반 계층'라고 한다. 유의어로는 플레이보이, 건달, 궁척이 있다). 한량처럼 놀면서 하고 싶은 거 하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운동하고 싶을 때 운동하는 내가 제일 행복해 보인단다. 조금도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내 꿈은 한량처럼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사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최대한 그렇게 살아왔다. 내가 스스로 모든 행위에 대한 결정권을 갖는 것. 그게 내 인생 가장 중요한 가치다.


내게 한량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내 아내밖에 없다. 아내가 아니면 내가 그렇게 놀고먹는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겉으론 엄청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이니까. 미국 MBA, 그중에서도 학업 강도가 센 버지니아 다든 스쿨을 다니면서 복수 학위로 데이터 사이언스 석사를 이수하고, 실리콘밸리 기업에서 일하고, 브런치에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영어 튜터링을 하는 게 아무리 봐도 그저 놀고먹는 것처럼 보이진 않기 때문이다. 생각해봤다. 내가 이렇게 겉으로는 그럭저럭 많은 일들을 해내면서 안으로는 어떻게 놀고먹을 수 있는가? 나는 나도 모르게 두 가지 방법을 실천하고 있었다. 첫째는 '포기'이고, 둘째는 '만족'이다.


내 한계를 인정하자

먼저 내 인생의 우선순위를 정한다. 가족, 연애, 일, 취미, 휴식, 여행, 친구, 육아 등을 자기에게 중요한 순서대로 나열한다. 그리고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데까지만 남기고 나머지는 깔끔하게 포기한다. 간단하다. 내 능력과 상황이 3번까지 허용한다면 4번 부터는 버리는 식이다. 4번 5번이 안 중요해서 포기하는 게 절대 아니다. 내 한계 밖의 일이기 때문에 겸허히 인정하고 떠나보내는 것이다. 인정하자. 모든 일을 잘할 수는 없다.


사람마다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도 다르고 처한 상황도 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둘러보지 않고 나 자신만 최대한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게 중요하다. 실제로 나는 3번까지 감당할 수 있는데, 주변을 둘러보면 다들 5, 6번까지 붙들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대세에 편승하려고 하면 인생이 고달프다. 물론 누구나 다 가지고 싶다. 하지면 현실은 내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결국 '다 행복하자고 하는 일'이라는 데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포기하면 더 집중할 수 있고, 집중하면 더 행복해진다.


무조건 열심히 하진 말자

'포기'가 너무 극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면 적당한 '만족'은 어떨까? 영어의 'satisfice'를 번역할 적당한 말이 없으니 그냥 '만족'이라고 부르자. 'Satisfice'는 '만족시키다'라는 의미의 'satisfy'와 '희생시키다'라는 의미의 'sacrifice'의 합성어다. 어떤 적당한 기준점을 뛰어넘는 부분은 희생(포기)하고 적절한 선에서 만족한다는 의미다. 반의어는 극대화한다는 의미로 'maximize'이다. 이렇게 의사결정을 만족(satisfice) vs. 극대화(maximize) 프레임으로 이해하는 관점은 인간의 의사결정을 주로 연구한 미국의 경제학자 Herbert Simon이 1950년대에 제안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satisficer vs. maximizer 스펙트럼 위에 존재한다. 이것도 고정된 것이 아니고 분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어떤 수험생이 연세대와 고려대에 합격했는데 이를 거부하고 서울대에 가기 위해서 재수를 선택한다면 이 수험생은 적어도 대학 진학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maximizer인 것이다. 반대로 나중에 결혼이라는 문제 앞에서는 적당히 좋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satisficer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우리는 모든 의사결정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에 최선을 다해서 끝장을 보고 말 것인가 아니면 적절히 만족하는 수준에서 마침표를 찍을 것인가?


나는 거의 분야를 막론하고 satisficer에 가까운 사람이다. 대학생일 때 나는 성적을 타협의 대상으로 봤다. 성적이란 건 투입된 시간에 비해 감소하는 한계효용을 보인다. A-에서 A로 올리는 데 10시간이 걸린다면 A에서 A+로 올리는 데에는 20시간 또는 그 이상이 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내 타깃은 A- 또는 A였다. 내가 좋아하는 과목은 A+를 목표로 삼았지만 대부분은 A- 정도면 만족했다. 그러면 놀고먹을 수 있었다.


올 A+가 목표인 사람도 있을 텐데 그것도 좋다. 자기 선택이니 나쁠 건 없다. 다만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포기하고 있는 게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과연 올 A+를 받으려고 쓴 시간들의 가치가 그 시간에 연애를 못함으로써 발생하는 기회비용보다 큰 것인지 알고 선택해야 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렇게 교육받아서, 부모님이 그렇게 살라고 해서, 취업시장이 그걸 원해서 하는 건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깊은 숙고 없이 무조건 열심과 시간을 쏟아붓는 사람들에게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시간에 대해 깊이 고려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마치 시간이 공짜인 것처럼 허비한다.


절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살자는 게 아니다. 나도 절대 그러고 싶지 않다. 나는 한 분야에 절대적 전문성을 가진 이들을 동경한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다만 정말 내게 중요한 어떤 한 두 가지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라는 자원을 지혜롭게 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오늘도 같은 결론에 다다른다. 내가 누군지 정확하게 인지하는 게 모든 일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1)  능력과 상황의 한계를 알고 인정하는 것과 2) 내가 진짜 원하는  뭔지 확실히 정의하는  말이다. 1번은 이제 좀 알겠는데 2번은 아직 잘 모르겠다. 모르니까 아직 다른 데서 아낀 시간과 에너지를 놀고먹는 데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먹고 놀 시간이 없으면 절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볼 시간도 여유도 없을 테니까. 바쁘게 사는 사람이 마음은 더 편한 이유다. 고민할 시간 같은 거 없으니까. 여유가 있어야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것이다. 배가 고프면 배고프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다. 나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로 생각하면서 살겠다.


그나저나 아내에게 오늘 다시 물어봐야겠다.


내가 뭘 제일 잘하는 것 같아? 내가 뭘 할 때 제일 행복해 보여?
...
놀고먹는 거 말고 =_=

    



커버 이미지: Photo by Simon Migaj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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