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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내의 퇴사 D-Day

꿈은 모르겠고 일단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

by 최혁재

지난 글: #1 신혼 3개월 차 백수 부부_아내와 함께 앞으로 1년간 온전히 우리 스스로에게 투자하기로 했다




2018년 6월 19일, 오늘은 아내가 퇴사하는 날이다. 어쩐지 아침부터 아내가 너무 가볍게 일찍 일어난다 싶더라. 출근하면서 그렇게 밝은 것도 오랜만이었다. 나는 아직 한 달이나(?) 더 다녀야 하는데... 먼저 백수가 되는 아내가 부럽다.


아내는 파주에 있는 모(?) 디스플레이 회사 엔지니어로 5년 넘게 일해왔다. 대학교 3학년 어느 날, 수업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던 길에 마침 학교에 들렀던 기업설명회에 붙잡혀 덜컥 입사지원서를 넣었고, 합격했다. 어이없는 건 당시 여자친구였던 아내는 자기가 입사하게 될 회사가 얼마나 큰 회사인지, 정확히 뭐하는 회사 인지도 몰랐던 것. 중견기업 정도로 생각한 건가... 아무튼 3학년에 입사 확정을 주고 4학년 동안에는 월 100만 원씩 장학금을 주더라. 그렇게 좋은 회사가 있다니 충격이었다.


같은 시기에 아내는 입사했고 나는 입대했다. 아내는 자꾸 자기가 나보다 오래참고 회사 다녔다고 하는데, "That's no no". 군대까지 커리어로 쳐준다면 나도 딱 아내만큼은 일한 거다. 군대에서 아내와 통화하느라 공중전화비를 월 15만 원씩 썼는데, 그 당시 병장 월급이 10만 원이었다. (생각할수록 열 받는데 아니, 나라 지키는 군인들한테 공중전화 요금을 저만큼 X 받아야 하나?) 아무튼 그만큼 많이 통화했는데, 내용은 주로 욕하거나 우는 아내의 회사 이야기를 들어주는 거였다. 내가 군대에서 배운 욕보다 아내가 회사에서 배운 게 더했다.


조직생활이 힘들어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내가 그만큼 좋아서 그랬는지 아내는 거의 매주 면회를 왔다. 면회자가 있어야만 주말에 한 번이라도 치킨과 피자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동기들이 나를 부러워했다. 힘든 군 생활에서 여자친구 면회와 치킨/피자는 삶의 이유였다. 비록 울타리 속 외로운 세상에 갇혀있었지만, 주말이 되면 여자친구를 볼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한 주를 살았던 시절이었다. 자주 면회 와준 아내에게 고맙다.


나는 '하고 싶은 거 해야 한다', '참고 살면 안 된다'라고 강하게 믿는 사람이다. 아내가 회사 다니면서 힘들어할 때마다 진심으로 그만두길 바랬다. 그런 해결책 같은 조언이 별로 위로는 안됐겠지만 말이다. 아직 결혼도 안 한 군인 남자친구 어딜 믿고 덜컥 자기 회사를 그만둘 수 있을까. 여하튼 참고 또 참고 다닌 게 5년이 넘었다. 그만두고 다른 거 하고 싶은 거 하라고 그렇게 내가 노래를 불러도 듣는 시늉도 안 하더니, 지난달 근무시간에 갑자기 전화가 와서는 "나 이제 그만둘래"라고 하더라. 드디어 용기가 생긴 걸까? 기쁜 맘으로 "그래 축하해"했다.


근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딘가 초조해하는 아내를 발견했는데, 퇴사에 대한 결심이 흔들리는 건 전혀 아니었다. 다만 퇴사하면 뭘 해야 할지 계획도 없고, 아직 딱히 꿈이나 하고 싶은 일도 없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거다. 회사에 퇴사를 통보하고 시간이 많이 남은 아내는 하루 종일 인터넷 검색에 매달렸다. 근데 뭘 하면 좋을지 검색으로 찾을 수 있다면, 우린 모두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떠나고 회사에 아무도 없겠지. 그나마 내가 아내에게 추천해준 건 코딩이다. 원래 아내도 공대 출신인 데다 성격상 혼자 컴퓨터랑 놀 수 있는 개발이 딱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문 아내는 또 폭풍 검색한 후에 '풀스텍 웹개발 부트캠프'에 등록하고 입금까지 해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말릴 새도 없었다(그래도 다행히 다음날 환불받았다). 돈 얼마를 주고 뭘 배워도 말릴 생각 1도 없지만, 이건 한번 말리고 싶었다. 왜냐하면 이건 진짜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퇴사 후 아무것도 안 하는 상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폭주(?)하는 거 같았으니까. 아내는 평생 앞만 보고 달려온 사람이다. 이제는 안 그랬으면 해서 아내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초조한 거 나도 이해해.
코딩이든 뭐든 다 좋은데, 그런 걸 떠나서 일단 퇴사하면 아무것도 하지 마.
아무것도 안 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그다음에 하고 싶은 거 배우자.


아내나 나나 평생 어디 하나에 깊이 꽂히는 게 없이 살았다. 아내는 고등학교 때 파일럿이 되겠다고 공군사관학교에 지원했던 게 마지막 꿈이었던 것 같고, 나는 원래 금방 질리는 성격이라 어디에 꽂혀도 오래가지 않았다. 딱히 못하는 것도 별로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뛰어나게 잘하는 것도 없는 우리 부부다. 우린 뭘 좋아하는 걸까? 어떤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 걸까? 우리 꿈은 뭐고 어떻게 살아야 재밌고 행복할까? 나는 10년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아내는 평생 앞만 보고 달리느라 그런 거 찾을 여유를 가져본 적이 없단다. 그래? 그럼 이제 찾으면 되지. 29살 아직 젊고, 퇴사하면 시간 많고, 아직 애기도 없으니까. 지금보다 더 적합한 시간이 평생 또 한 번 올까?


퇴사 축하해. 한 달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려. 같이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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