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함께 앞으로 1년간 온전히 우리 스스로에게 투자하기로 했다
2015년 7월 첫 직장생활을 증권사 리서치센터에서 시작했습니다. 비정상적으로 나름 신나게 일하다 보니 2년 만에 외환(FX) 애널리스트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애널리스트로서 제대로 승부를 보기도 전에 자산운용사에서 오퍼를 받고 이직하게 됐습니다. 2017년 11월이었습니다. 애널리스트 일은 좋았지만 직접 운용하는 곳에 가서 배울 게 많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새 조직은 생각과 많이 달랐습니다. 이 회사만의 문제였다면 이직을 알아봤을 텐데, 결국 국내 금융회사는 웬만큼 비슷할 거라는 결론을 혼자 마음대로 내렸습니다. 5년, 10년 뒤 이대로는 이곳 금융업계에서 제가 더할 가치가 별로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신혼 3개월 차에, 이직 6개월 만에 퇴사를 결정했습니다.
저보다 한 발 앞서 퇴사하기로 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앞으로 1년간 오직 우리 스스로에게 투자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자고 싶은 만큼 자고 배우고 싶은 걸 공부하고 먹고 싶을 때 먹을 계획입니다. 부족한 글쓰기지만 1년 동안 열심히 쓰다 보면 그래도 읽기에 불편하지는 않을 글은 쓸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증권사 애널리스트, 자산운용사에서 겪은 경험과 백수가 되어 부부가 함께 겪게 될 일들에 대해, 부부가 서울에서 100만 원으로 한 달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해, 미국 MBA 지원 과정에 관해, 그리고 또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해 열심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하고 싶은 일 하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증권사 리서치센터에서 자산운용사로 이직한 지 6개월이 지났다. 인생이 180도 달라졌다. 주 80시간 근무는 40시간으로 줄었고, 토요일 일요일을 가리지 않던 주말 출근은 옛날 일이 됐다. 예상보다 더 일찍 다가온 기회 덕분에 대리로 진급하면서 연봉도 단숨에 30% 이상 올랐고, 그 사이 결혼도 했다. 이직 후 회사 사람들과 관계도 원만해서 인간관계 스트레스도 거의 없어서 겉으로는 뭐 하나 빠짐없이 좋아 보였다.
그런데 이직한 지 한두 달 만에 '어, 이 조직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닌데?'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어딘가 찝찝하고 불편했다. 새 직장은 어떠냐는 지인들 질문에는 그저 "몸은 편한데 재미가 없어"라고 건성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재미없다는 게 팩트였다. 이게 회사 다니기 싫은 합당한 이유로 간주될는지는 모르겠지만(물론 이 밖에도 회사에 정 떨어지는 부분은 점점 늘어갔다), 어쨌든 회사생활 몇 년 만에 처음으로 1분이라도 더 일찍 퇴근하고 싶어 졌다. 증권회사에서 지녔던 흥미와 열정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냥 미국 MBA 가기 전까지만 '영혼 없이 다니면서 돈도 모으고 남는 시간에 공부도 해야겠다'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문제는 내 참을성이 제로에 가깝다는 점이다. 어려서부터 싫은 일은 당장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는 성격이었다. 공부도 좋아서 했던 거지 싫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런 성격이 바뀔 리 없었다. 0.5~1년을 그냥 월급봉투와 퇴근 후 삶만 바라보며 참기에는 내 성격이 받쳐주지 못했다. 특히 '벌써 서른 살'이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가시질 않았다. 내 서른 살의 6개월, 1년은 나중에 돌아보면 얼마나 소중할까? 그저 견디거나 외면하면서 흘려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운 시간이라는 건 확실하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입사 6개월 만에 퇴사를 결심했다.
솔직히 두려웠다. 이직한 지 6개월,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퇴사라니…. 더구나 아내도 퇴사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내린 결정이라 어깨는 더 무거웠다. 확실히 싱글일 때처럼 거침없이 의사결정을 하기엔 책임감이 커져 있었다. 막상 퇴사하기로 마음먹고 나서 며칠 동안 잠을 설쳤다. 아내도 처음에는 생각보다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듯했지만, 이후 며칠 동안 하루 몇 시간 간격으로 다이내믹한 감정의 동요를 보여줬다. 그럴 때마다 정말 퇴사가 최선의 선택인지 스스로 되묻고 또 되물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결국 난 이미 퇴사를 결심한 순간부터 의지를 굽힐 마음이 없었다. 다만 두려운 마음을 안정시켜줄 그럴듯한 논리와 상황, 위로가 필요했던 것뿐이었다.
몇 년 만에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연설 영상을 여러 번 돌려봤다. 대학생 때 거의 외우다시피 했던 연설인데 오랜만에 다시 보니 또 한 번 새롭게 다가왔다. 두려운 마음을 안정시켜줄 위로가 필요했던 내게 가장 감명 깊게 다가온 것은 이 부분이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far more interesting.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잡스는 대학교에 입학한 지 6개월 만에 회의를 느꼈다. 대학이 자기 인생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퇴를 결심하고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내게 가장 위로가 됐던 점은 스티브 잡스 같은 전설적인 인물도 대학 자퇴라는 결정을 하면서 '두려움'을 느꼈다는 점인데, 덕분에 내가 느끼는 두려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또 자기의 직관과 호기심을 따르느라 고생한 경험들이 시간이 지니고 보니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더라는 잡스의 고백도 내 가슴을 움직였다.
물론 나는 스티브 잡스가 아니다. 빌 게이츠도 아니고 마크 저커버그도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어떤 생각으로 대학을 때려치웠는지 대략 공감할 수는 있다. 잡스는 등록금을 걱정하는 처지였으니 예외로 두더라도, 게이츠와 저커버그는 왜 하버드를 때려치워야만 했을까? 대학생 신분을 유지하면서 사업을 키우고 열정을 쫓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휴학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마도 이 둘은 스스로 판단하기에 '의미 없는' 대학교육에 1시간이라도 더 시간을 쓰는 게 가치가 없다는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잡스가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이라고 한 것처럼 말이다. 나도 스스로 나를 회사에 붙잡아 둘 어떤 가치도 찾지 못했다.
막상 퇴사를 결정하고 회사에 최종 통보하고 나니 마음이 금세 가벼워졌다. 두려움도 미련도 후회도 없다. 사람들은 이 회사 그만두고 어디로 가냐고 자꾸 물어보는데 나는 '집에 간다'라고 대답한다. 팩트다. 집에서 하고 싶은 공부하고 글도 쓰고 자고 싶은 만큼 자고 운동도 하고 1년은 그렇게 내 맘대로 보내려고 한다. 생활비 월 100만 원으로 최대한 아껴서 버티면 수년은 먹고 놀아도 넉넉할 정도의 돈은 모았다. 다만 아프면 안 된다. 병원비 나가니까. 치킨 먹고 싶어도 참아야 할 일이 올진 모르겠지만, 신혼 1년쯤 그렇게 살아보는 것도 나름 재밌지 않을까 아직 젊은데.
혼자가 아니라서, 아내와 함께라서 더 알콩달콩 재밌을 앞으로 1년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