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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혁재 Nov 23. 2020

다시 사피엔스

같은 책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다시 집어 들었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건 2015년쯤이었는데, 첫인상은 매우 나빴다. 당시 모든 서가의 베스트셀러 목록 1위를 이 책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 책이 다루는 말도 안 되게 넓은 범위에 대해 난 회의적이었다. 예를 들어, 하라리가 말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인지 혁명'은 지금으로부터 7만 년 전의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 문자가 없을 때였으니 당연히 기록도 없다. 이런 시대에 대해 100 페이지가 넘게, 그것도 나름 생동감 넘치게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못 마땅했다. 그저 상상을 토대로 한 소설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당시 내가 끼고 있던 안경은 '기독교적 세계관'이라는 꽤나 색이 짙은 안경이었다. 이 안경을 끼고 바라본 책 내용은 말 그대로 헛소리였다. 시작부터 거짓으로 전제하고 읽는 책이 내게 어떤 지적 자극을 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당시엔 책을 끝까지 다 읽어야 한다는 쓸데없는 고집이 있어서 끝까지 참고 읽었다.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고, 다시 이 책을 읽을 일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냥 '마케팅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픽션 베스트셀러를 읽었다'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러다 이 책을 다시 만났다. 계기는 이번 학기에 수강 중인 Ultimate Questions라는 수업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왜 여기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주변 환경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가?' 이런 삶의 중요한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 보고, 읽고, 같이 토론하는 수업이다. 수업 준비를 위해 읽어야 하는 여러 자료 중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일부 챕터가 있었다.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2015년에 읽었던 종이책은 어디다 버렸는지 알 수도 없어서 ebook으로 다시 구매해야 했다).


안경을 내려놓고 맨 눈으로 다시 본 <사피엔스>는 전혀 다른 책이었다. 같은 내용이지만 내 입장과 시각을 열어놓고 보니 완전히 다르게 다가왔다. 이건 내가 아직도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다. 어떤 세계관을 가졌던 그걸 잠시 내려놓고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인정할 수 있게 된다. 배움은 여기서 출발한다는 걸 <사피엔스>를 다시 읽으면서 몸소 느끼게 됐다.


오래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보자. 좋았던 책 말고 별로였던 책이어야 한다. 마음이 불편하거나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끝까지 다 못 읽은 책이면 더 좋다. 색안경은 잠시 벗어두고 저자의 말에 귀 기울여 보자. 여전히 싫고 마음이 불편할 수도 있다. 아직 전혀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세계관이 바뀌었을 수도 있고, 그 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배경 지식이 갖춰졌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처음 읽을 때와는 조금은 다른 경험일 것이다. 만일 조금도 다르지 않고 똑같다면 반성해 봐야 한다. 나라는 사람이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뜻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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