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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혁재 Nov 16. 2020

그렇지만 나는 한 번도 걷지 않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인용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잘 알려진 달리기 광이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는 그의 달리기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담담한 문장으로 상세히 서술돼 있다.


그는 일반 마라톤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나 보다. 울트라 마라톤(100km를 하루 종일 달리는 마라톤)에도 여러 차례 도전했다. 첫 도전은 1996년 6월 23일, 일본 사로마 호수 마라톤이었다.


42km보다 더 긴 거리를 달린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50km 지점을 넘어선 뒤부터는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버렸고 발은 팅팅 불어서 한 사이즈 큰 신발로 갈아 신어야 했다. 다리로 달리기가 힘들어 팔을 더 크게 휘저어야 했다. 팔로 달린 것이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왜 저렇게 까지 달려야 하는지. 왜 수많은 사람들이 관절과 근육에 큰 무리가 되는 마라톤에 중독되다시피 하는 건지. 운동도 적당히 해야 몸에 좋은 건데 말이다.


무리를 해서 계속 달리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걷는 쪽이 현명했을지도 모른다. 많은 주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 번도 걷지 않았다.... 나는 걷기 위해서 이 레이스에 참가한 건 아니다... 아무리 달리는 스피드가 떨어졌다 해도 걸을 수는 없다. 그것이 규칙이다. 만약 자신이 정한 규칙을 한 번이라도 깨트린다면 앞으로도 다시 규칙을 깨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레이스를 완주하는 것은 아마도 어렵게 될 것이다.


여전히 이해는 못 하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 마라톤의 두 배 거리가 넘는 100km 울트라 마라톤. 그는 한 번도 걷지 않고 11시간 40여분 만에 완주했다. 그의 끈기에 소름이 돋는다. 나는 단 5km를 뛰어도 힘들면 걷는데 말이다. 체력도 정신력도 아직 그 정도다.


꼭 소설 쓰는 일이 아니더라도 저런 정신력으로 뭔들 못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자주 '유연성'이라는 핑계로 달리기를 멈추고 걷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식하게 원칙에 얽매이는 것보다는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게 오늘날 더 중요한 덕목이라는 핑계 말이다.


그 누구라도 저런 체력과 정신력을 기를 수 있다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룬 것과 비슷한 일들을 여러 분야에서 성취할 수 있지 않을까. 이건 <그릿>을 쓴 앤젤라Angela Duckworth가 그녀의 행동과학 연구로 이미 보여준 바이기도 하다. 재능은 과대평가됐다.


재능이 많은 사람도, 적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걷고 있으면서 재능을 탓하진 말자. 재능은 '그렇지만 나는 한 번도 걷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체력과 끈기 위에 꽃핀다. 마라톤에 인생이 담겨있다는 말은 이런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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