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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혁재 Dec 16. 2020

기억은 정점과 종점의 평균이다


육아는 보통일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30년 남짓 살면서 해 본 일 중에는 가장 어렵다. 아이가 매일 천사 같은 미소로 전에 듣도 보도 못한 행복감을 주는데도 그렇다. 너무 행복하면서도, 또 너무 힘들다. 하나도 이런데, 둘, 셋을 키워내는 부모들에게 경외감을 느끼는 요즘이다.


출산도 마찬가지다. 남자라 직접 해보지는 못했지만,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보고 느꼈다. 임신과 출산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하는지를. 출산은 자기 목숨을 거는 일이다. 의료기술 발달로 오늘날 출산 중에 사망하는 일은 드물지만, 또 아예 없는 일도 아니다. 죽지는 않더라도 여러 후유증으로 장기간 고생하게 될 수도 있다. 자기 핏줄을 낳는 일이 아니라면 여러모로 못할 짓이다.


육아와 출산이 이렇게 힘든데 왜 우리는 이런 일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벌이는 걸까? 우리는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도록 생겨먹지 않았던가?


‘이야기하는 자아’라는 개념에서 힌트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속에 '이야기하는 자아'와 ‘경험하는 자아’가 있다고 하자(이 모델은 과학적 증명 여부를 떠나 우리 행동과 의사결정 전반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경험하는 자아는 ‘순간’의 주인이다. 매 순간 우리가 겪는 일들은 이 경험하는 자아를 통해 인식된다. 자기에게 벌어지는 일에 반응해서 기쁘다, 슬프다, 아프다, 신난다 같은 감정을 경험한다. 한편 순간이 지나고 경험이 과거의 일이 된 뒤부터는 이야기하는 자아가 운전대를 넘겨받는다. 기억을 꺼내 해석하는 건 온전히 이야기하는 자아의 몫이다. 경험하는 자아는 조금도 거들지 못한다. 순간은 찰나에 불과하고 기억은 길게 간다는 점에서 우리는 거의 항상 이야기하는 자아에 지배받는다. 우리가 ‘내 생각’이라고 할 때 ‘나’는 거의 항상 이야기하는 자아다.


재밌는 점은 이 이야기하는 자아가 정보를 단순화하는 방식에 독특한 일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정점(peak)-종점(end) 평균 법칙’을 일관되게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이야기하는 자아가 출산 경험을 기억에 저장하거나 불러들일 때, 시간에 따른 고통과 기쁨의 그래프에서 정점과 끝부분의 평균만 취하는 것이다. 유투브 영상처럼 연속된 스트림으로 모든 순간의 경험을 저장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우리 뇌의 저장 공간은 유한하므로 그럴 수가 없다. 평균내기라는 효율적인 방법으로 정보를 압축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찬물 실험’이라 불리는 실험을 통해 이야기하는 자아의 이런 특성을 밝혀냈다. 실험 1단계에서는 피실험자들에게 찬 물에 60초간 손을 담그게 했다. 2단계에서는 같은 온도의 물에 60초간 손을 담그게 한 뒤 곧이어 조금 덜 차가운 물에 30초 더 손을 담그게 했다. 두 물 다 고통스러울 듯 말 듯한 불쾌한 자극이었다. 3단계에서는 피실험자들에게 앞선 1, 2단계 실험 중 어느 쪽을 한 번 더 반복하겠느냐고 물었다. 80%가 2단계를 선택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결과다. 1단계는 60초의 고통을, 2단계는 같은 60초에 30초의 추가적 고통이 뒤따르는 행위다. 고통의 총량은 2단계가 훨씬 크다. 그런데도 대다수 사람들이 2단계를 반복하길 원했다. 카너먼은 뒤에 여러 실험을 통해 이유를 밝혔는데, 요지는 이것이다. 이야기하는 자아는 시간이나 총량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또는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지난 경험을 평가할 때, 이야기하는 자아는 고통의 정점과 종점의 평균의 크기로 판단을 내린다. 위 예에서 1단계와 2단계 고통의 정점은 대등하다. 하지만 종점, 즉 경험의 끝자락에서 느끼는 고통은 2단계가 더 작다. 이를 평균내면 2단계 고통이 1단계 보다 더 작았다고 해석하게 된다. 직접 고통을 경험한 경험하는 자아는 억울하다. 2단계가 분명 더 길고 고통스러웠는데, 이야기하는 자아가 이를 무시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 속성을 스스로 유리하게 사용만 할 수 있다면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운동은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동안에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고통스러운 일로 시작해 그대로 끝이 나버리면 우리 기억엔 고통만 그대로 남는다. 다시 그 행동을 하고 싶을 리가 없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고통의 크기를 낮추거나 반대로 희열의 감정을 끼어 넣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큰 반전을 이룰 수 있다. 운동 중 정점의 고통이 마지막 희열과 평균으로 퉁쳐져서 상대적으로 좋은 기억으로 머리에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하는 자아의 속성을 이용해 우리 뇌를 해킹하는 것이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중간 과정이 아무짝에 쓸모없다는 게 아니라, 끝을 좋게 마무리해야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고, 우리의 이야기하는 자아는 나중에 이것만 들춰볼 수 있다. 안타깝지만 정점을 제외한 중간 과정은 주목받지 못한다. 경험하는 자아에게는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겠지만, 이야기하는 자아에게는 고려대상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쁜 소식은 우리 기억이 정점과 결말에 의해 왜곡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고, 좋은 소식은 이제 우리가 이런 기재를 이해하고 활용해서 우리 기억과 행위를 해킹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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