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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혁재 Jun 22. 2021

그까짓 몇천만 원 - 2




친구 A가 나보다 몇천만 원이나 연봉을 더 받고 새롭게 미국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 게 배 아파서 그까짓 몇천만 원 (brunch.co.kr)를 썼다. 배 아픈 이 감정을 어떻게 고상하게 포장하고 소화해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마음을 문자화해 보면 한결 가벼워질까 싶어 그런 글을 썼다. 불편한 감정이 대번에 해소되진 않았지만 확실히 생각을 글로 적어 그것을 나로부터 최대한 객관화하려는 시도는 나름의 효과가 있었다. 생각이 자아에 너무 구질하게 매달려있으면 바로 보기 어려운데, 글쓰기는 그런 생각을 자아로부터 떨어뜨리는 데 도움이 된다.


글을 써서 감정과 생각을 객관화하는 일 다음으로 마음 정리에 효과적인 방법은 시간에게 흘러갈 시간을 허락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자연스럽게 이해 가고 수긍가는 일들이 있다. 별다른 노력도 필요하지 않고 그저 풀리지 않은 실타래 같은 생각을 가만히 묵혀두면 된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경험이나 갑작스러운 생각, 책에서 만난 글귀 같은 것들이 빡빡했던 실타래를 느슨하게 풀어놓는다. 오늘 샤워 중에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나는 지난 글에서 이렇게 썼다.

이 출발선상의 간극을 좁히는 데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다. 


실타래가 풀리고 보니 이 문장이 틀린 전제로 가득하다는 점이 드러났다. 지금을 출발선상이라고 본 것, 앞뒤 거리가 벌어져 있다고 평가한 것, 그 간극을 좁혀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 것 모두 섣부른 행동이었다.


출발선상을 지금이 아니라 2년 전인 MBA 학위 시작점으로 뒀다면 얘기가 180도 달라진다. 나는 15만 달러에 이르는 장학금을 받고 경영대학원 생활을 시작했다. 친구 A는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학비를 감당하기 위해 틈틈이 학교 채점 알바를 하는 등 애써야 했다. 나는 장학금에 힘입어 아이를 낳을 여유를 얻었지만 A는 출산과 육아를 뒤로 미뤄야 했다. 출발선을 어디에 긋고 비교하기 시작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앞에 있을 때도 있고 뒤에 있을 때도 있다.


단순히 연봉 차이가 앞뒤 간 거리를 나타내는 지표라고 할 수도 없다. 수입의 크기만큼 중요한 건 수입의 질이다. 20만 불 받고 주 80시간 일하는 것과 10만 불 연봉에 주 40시간 일하는 것 중에 과연 전자가 질적으로 앞선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은 그 반대다. 시간은 한정된 자원이라서 쓸수록 한계비용이 증가한다. 증가하는 한계비용을 보상받으려면 80시간 일하는 사람은 20만 불이 아니라 25만 불 이상 받아야 한다. 여가시간이 5시간인 사람과 1시간밖에 없는 사람의 시간당 한계효용은 다를 수밖에 없다. 연봉은 커리어를 구성하는 많은 변수 중 하나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축을 '연봉'으로 하는 1차원의 직선을 경주할 필요가 없다. 같은 방향으로 달리면서 그저 앞에 있는 사람과의 거리 차이로 내 상태를 재단하려는 건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런 시합에서는 선두에 있는 단 한 사람만 행복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지 않은가. 새로운 축에 '재미'를 추가해 2차원 평면을 여행할 수도 있고, 여기에 '보람' 축까지 더해 3차원 게임을 플레이할 수도 있다. 이 중 어느 판에서 놀지 선택은 우리 몫이다. 처음부터 스스로를 1차원적 비교에 가두고 배 아파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 상황을 정리하고 이해하는 건 '느린 뇌'의 역할이라 때때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우리의 '빠른 뇌'는 즉각적으로 작동해서 비록 잠시라도 박탈감, 패배감, 초조함을 느끼게 만들고 소화기관에 제동을 걸 것이다. 그래도 다음번에 비슷하게 '배 아픈 일'을 마주하면 빠른 뇌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재빠르게 느린 뇌를 켤 수 있지 않을까. 마치 우리 몸 안에서 백신이 작용하는 것과 비슷하게(저는 지금 다음번에 배 아프지 말라고 스스로 백신을 놓는 중인가 봅니다).


그냥 다른 사람의 성취와 행운에 조건도 이유도 없는 축복을 보내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역시나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길게 하는 건 내가 지질해서다. 안타깝게도 이 글의 결론은 그렇게 밖에 낼 수 없을 것 같다. 에이, 그까짓 몇천만 원…….



커버 이미지: Photo by Alexander Mil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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