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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혁재 Aug 16. 2021

진짜 탄력근무제란

정말이지 이름만 들어도 지긋지긋한 코로나 바이러스지만, 그놈이 가져온 긍정적인 변화도 분명 있다. 180도 달라진 업무 환경이 하나다. 특히 내가 일하고 있는 미국은 실리콘밸리 테크 기업들을 중심으로 업무방식을 처음부터 다시 상상하고 있다.


팬데믹이 초래한 락다운은 미국 전역 거의 대부분 사무실에서 사람들을 내쫓았다. 지난 1년 반 동안 재택근무는 옵션이 아닌 기본이 됐다. 반기는 사람도, 아닌 사람도 있었지만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년을 훌쩍 넘겼다. 이제 미국 직장인들의 다수는 재택근무 환경에 익숙하고,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많은 기업들도 이런 직원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개인 상황과 선호를 최대한 존중하는 쪽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미국 기업들이 채택하고 있는 포스트 팬데믹 업무 방식은 세 가지다. 1) 오피스를 아예 없애고 전면 재택근무로 돌리던지, 2) 출퇴근과 재택근무를 유동적으로 운영하던지, 3) 기존 방식을 고수하던지가 그것이다. 물론 대다수는 가운데 머물면서 양쪽의 이점을 모두 누리려는 계획일 것이다.


내가 일하는 회사도 마찬가지다. Flexible Workplace Program이라고 해서 업무 분야에 따라, 팀에 따라 원하는 업무 방식을 자율적으로 선택하게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속한 재무 본부는 꼭 오피스에 모여서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업무가 아니기 때문에 굳이 몸소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회사든 집이든 원하는 곳에서 자기 맡은 일만 하면 그만이다. 이런 '탄력근무제' 프로그램 확대에 발맞춰 회사는 직원들에게 배정된 자리를 없애버렸다. 이제 '내 책상'이란 게 없게 된 것이다. 출근을 하려면 원하는 책상을 온라인으로 미리 예약하고 사용하면 된다.


우리 회사의 경우 출근할 수 있는 오피스가 샌프란시스코 시내에 네 군데 있다. 회사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된 나는 출근할 때마다 다른 오피스로 나가 근무하고 있다. 어느 건물의 어느 층, 그리고 어느 자리가 제일 마음에 들지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어느 건물이든 이왕이면 뷰가 가장 좋은 책상을 확인하고 예약하려 신경 쓰는 편이다. 좋은 위치를 선점하면 샌프란시스코 앞바다와 베이 브릿지를 보며 일할 수 있기 때문에 노동을 하면서도 기분이 더 산뜻하다(고 스스로 위로하지만 역시 노동은 안 하는 게 최고다).


어쨌든 코로나가 가져온 이런 근태 자율성은 내게 최고의 선물이다. 언제 어디서 내가 어떻게 일하든 누구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건 정말 꿈같은 일이다. 첫 직장이었던 여의도 증권사에서 주 80시간 일하면서도 즐거울 수 있었던 게 바로 자율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낮잠을 자고 밤에 일하든, 저녁을 먹고 운동을 한 뒤 새벽까지 일하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게 좋았다. 딱 그거 하나면 다 괜찮았다. 물론 다시는 그렇게 노예처럼 일만 하고 싶진 않지만, 적어도 업무상 높은 자율성을 다시 가지게 돼 만족스럽다.


한국 기업들도 몇 년 전부터 flexible 어쩌니 하는 프로그램을 더러 운영하는 것으로 안다. 내 아내가 다녔던 회사도 그중 하나였는데, 언제든 원하는 시간에 출근해 8시간 업무만 하면 되는 식이었다. 예를 들어, 오후 3시에 아이를 데리러 학교로 가야 한다면 아침 6시에 업무를 시작해 오후 2시에 퇴근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결국 정해진 장소에서 연속된 8시간 업무를 강제한다는 면에서 진짜 '탄력적'이라 볼 순 없다. 이제는 단순한 시간 놀이에서 공간으로 시선을 돌릴 때도 되지 않았을까.


어느 외국인 친구가 물었다. 미국에 어느 정도 일하고 살다가 언제쯤 한국에 돌아가고 싶으냐고.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대답했다. 적어도 회사를 다녀야 하는 나이와 상황 아래서는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고. 다시 주 5회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 들어가고 나가야 하는 환경에 나를 가둘 자신이 없다고. 그랬더니 한국 기업들도 똑같이 코로나를 겪고 있는데 변하지 않겠냐고 했다. 이런 시대적인 큰 사건이 지나가고 어떻게 변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면서. "그럴지도 모르지" 하면서 난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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