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들 다녀와"
내가 일하고 있는 회사에는 정해진 휴가 일수가 없다. 오해가 생길 수 있어 설명을 덧붙이자면 '1년에 15일' 같은 고정된 연차가 없다는 말이다. 개인의 성과가 가장 우선시되는 문화 위에서 대부분의 업무와 의사결정이 이뤄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자기 성과 평가를 희생해가면서까지 무리하게 휴가를 나다닐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니까. 어차피 중요한 건 맡은 책임을 다하는 것이지 근무일수를 채우는 게 아니지 않나. 지금 와서 보니 '1년에 며칠' 같은 규정이 있는 게 더 어색해 보인다. 본래 그것의 역할이 최소한의 휴식을 보장하는 근로자를 위한 보호장치였다면 얘기가 다르지만, 그게 아닌 건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므로.
정해진 휴가 일수가 없다는 사실보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어떻게 '연차를 올리느냐'하는 점이다. 간단히 말하면 연차라는 개념 자체가 없으니 결제 올리는 절차도 없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팀장님한테 허락을 받는 비공식적인 절차 정도는 있겠지'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그런 암묵적인 휴가 결제 과정조차 없다. 그냥 자기 업무 일정에 맞춰서 계획하고, 휴가일을 캘린더에 공유하고, 자기가 자리에 없을 때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조치만 취해놓으면 된다. 팀장 일은 팀장 일이고 내 일은 내 일이듯 휴가도 그렇다. 내 휴가를 누가 '결제'해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
실제 사례를 보자. 지지난주 금요일은 회사 공휴일이었다(코로나가 터진 이후로 직원들의 건강과 사기 증진을 위해 월 1회 정도 CEO의 재량으로 회사 차원의 임시 공휴일을 지정해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팀의 분기말 업무 사이클상 임시 공휴일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 팀장은 팀원들에게 유감이라면서 이번 금요일은 불가피하게 대부분 쉴 수 없는 처지겠지만 분기말이 지나면 알아서들 꼭 쉬라고 했다.
다들 한꺼번에 휴가들 가면 곤란하니 각자가 원하는 날짜를 의논해서 정한 뒤에 알려줘.
당연히 이런 대화도 없었다. 그냥 원하는 날을 캘린더에 표시해두고 다녀오라는 말만 있었다.
다른 팀원들(직급이 높은 선배들)의 휴가 일정을 신경 써가면서 결제를 올리고, 내 권리로 당연히 가는 휴가인데 무슨 '휴가 목적' 따위를 기재하고 상무의 결제까지 받아야 했던 말 같지도 않던 한국 직장 생활이 떠올라 잠깐 몸서리쳤다. 설마 2021년에 아직까지도 그러진 않겠지만, 혹시라도 그렇다면 이제 그러지 좀 말자.
커버 이미지: Photo by Chen Mizrach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