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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혁재 Oct 26. 2022

일 시키는 사람이 없다

회사에 일 시키는 사람이 없다. 일단 한국 회사에서 흔히 말하는 '사수'가 없다. 그 비슷한 역할을 여기서는 매니저라고 하는데, 이마저도 일 시키는 사람은 아니다. 내 매니저이자 팀장인 F는 아직까지도 이래라저래라 일을 시킨 적이 한 번도 없다. 그저 내가 팀과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업무 분야를 알려주고, 필요할 때 조언이나 가르침을 주는 정도다.


"이번 분기에 우리가 새로 론칭하는 X 제품 매출 전망/분석을 네가 맡아주면 어떨까? 지금까지 우리가 판매해온 제품과는 성격이 완전히 달라서 현재로선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은 분야지. 론칭이 되고 나면 실시간으로 같이 배워가면서 프로세스의 틀을 잡아 나가면 될 거야. 이것 말고 다른 관심 가는 분야나 프로젝트가 아이디어가 있으면 알아서 해봐도 좋아."


내가 처음 입사했을 당시 F가 내게 주었던 업무 지침은 이게 전부였다. 정말 저것뿐이었다. 그다음은 모두 나 하기에 달려있었다. 적재적소에 필요한 질문을 하는 것도 내 몫이었고, 각 분야의 전문가를 회사 내에서 찾아 관계를 맺는 것도 내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처음에는 무척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막 들어온 중고 신입인데 이렇게 방치해도 되는 건가...


매니저는 팀이 맡은 책임을 전반적으로 관리, 위임하고 조율하는 사람이지 일일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사람이 아닌 것. 실무는 대부분 팀원들 개인이 맡아서 재량껏 처리하고, 필요한 경우 매니저와 상의하고 또 조언을 구한다. 매니저는 자기의 전문성과 경험에 비춰 필요한 도움을 주고 때에 따라 더 나은 방향도 제시해 준다. 하지만 개별 업무의 진행 방향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팀원들 각자의 몫이다.


이런 업무 구조에서는 자기 업무의 경계가 분명해진다. "Who owns this?" 같은 말을 자주 듣게 되는데, 어떤 일이든지 맡아서 책임지는 누군가가 분명히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네 것 내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모두 책임감을 가지고 일할 수밖에 없다. 팀장이 감시나 압박을 통해서 업무 진행을 강제할 필요가 없는 이유다. 내 일은 내 일이고 팀장의 일은 그의 몫이다. 누가 누구에게 일을 시킬 이유가 없다.


코로나 이후에 더욱 보편화된 재택근무에 별다른 부작용이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집에서 일하든 회사에 나가든 개인의 업무능력과 성과는 자기 일의 진행 상황에 따라 투명하게 드러난다. 사무실이든 피서지에 있는 리조트 수영장이든, 어디에서 일하는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내가 일하지 않으면 빤히 티가 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업무가 잘 진행되면 여기저기서 곧잘 알아봐 주고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중요한 건 성과를 내는 것이기 때문에 무슨 요일, 어느 시간에 어떤 직원이 책상 앞에 앉아있는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팀장이 일을 시키지 않는 문화에 따른 장점이 또 하나 있는데, 그건 누가 시키지 않으면 자발적으로 뭐든 찾아서 하게 된다는 점이다. 원래 하려던 일도 누가 시키면 하기 싫어지기 십상이다. 그냥 그게 우리 습성이다. 그렇다면 본래 주어진 업무가 잘 관리되고 있는 상황에서 조금의 여유가 생기면 이곳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할까? 새롭고 흥미로운 일, 팀과 회사에 도움이 될 만한 일, 이제껏 바빠서 해보지 못했지만 장기적으로 가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자기 업무 영역을 넓혀간다. 자기가 맡고 있는 일의 영역이 넓고 그 영향력이 클수록 스스로 자기 가치를 증명하는 셈이다. 이는 회사가 자기를 자를 수 없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다. 누가 시키는 일을 억지로 하는 것보다 능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기적 직원들이 만드는 최고의 회사>라는 책에서 저자 유호현은 실리콘밸리 회사들의 업무 문화를 프로축구에 비교했다. 몸소 겪어보니 100% 공감 가는 얘기다. 회사는 직원들을 구단의 성공에 기여할 프로 축구 선수로 보고, 직원들도 회사를 자기가 성장할 수 있는 발판으로 여긴다. 팀의 성공에 기여하고 동시에 자기 몸값도 올리면 언제든 미련 없이 다른 팀으로 옮길 수 있다는 뜻이다. 회사와 직원은 서로의 성공과 성장을 돕는 동등한 계약 관계다.


손흥민의 커리어를 생각해보자. 자기 커리어를 위해, 축구가 좋아서, 매일 조금 더 나은 플레이를 하기 위해 전심으로 뛰는 손흥민에게 누군가의 감시나 강제가 조금이라도 필요할까? 토트넘 구단의 누누 산투 감독이 손흥민에게 더 열심히 플레이하라고, 이렇게 저렇게 공을 차 보라고 입 아프게 말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없다. 손흥민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를 위해 최선을 다해 플레이할 것이며, 감독의 역할은 전체 팀의 전략적 방향을 책임지고, 큰 그림 안에서 손흥민의 장점이 최대한 잘 드러나도록 돕는 것이다. 손흥민이 잘하면 손흥민의 시장 가치도 올라가지만 팀의 순위도 올라간다. 그러면 감독의 가치도 뛴다.


마찬가지다. 내 팀장은 나 또는 다른 팀원들을 감시할 필요도, 일부러 일을 시킬 필요도 없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를 위해 이기적으로 일한다. 우리 커리어가 좋은 방향으로 나가려면 지금 이 회사에서 좋은 성과로 보탬이 돼야 한다. 또 그 성과를 많은 관계자들에게 알려서 내 가치를 증명하고 높여가야 한다. 팀장은 팀원들이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고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게 도울뿐이다. 필요할 때 방향성을 제시하고, 장애물이 있을 때 제거해주는 식으로 말이다. 개인들이 알아서 잘하면 회사 내 팀의 기여도가 높아지고 팀장의 평가 또한 올라가는 선순환 구조다. 시키는 게 아니라 도와주는 게 팀장의 역할이다.


물론 실리콘밸리라고 회사들이 다 같지 않고, 팀장들도 저마다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실리콘밸리 IT 기업들이 축구 구단처럼 돌아간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선수(직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몸값을 높여 실리콘밸리(리그) 내 다른 회사(팀)로 이적(이직)하고, 팀(팀장)도 좋은 외부 선수(직원)를 발견할 때마다 좋은 값을 치르고 데려올 궁리를 한다. 이 생태계에서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기 때문에 일을 시킬 필요도, 감시할 필요도, 부탁할 필요도 없다. 그저 모두가 다치지 않고 잘 뛸 수 있게 잔디 관리만 잘하고 관중석에 앉아서 박수만 쳐주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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