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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혁재 Oct 26. 2022

실리콘밸리는 춘천에도 있다

나는 지금 미국 텍사스에 살고 있지만, 원한다면 언제든지 한국으로 날아갈 수 있다. 휴가 사용 여부와도 상관이 없다. 휴가를 내는 경우라면 멀리까지 온 김에 좀 쉬면 되고, 그게 아니라면 공간적 배경만 한국으로 바꿀 뿐 여느 날처럼 업무를 이어가면 된다. 미국-한국 간 시차가 있어서 불가피하게 새벽에 미팅에 참여하게 되는 경우야 있겠지만 뭐 월급 받는 입장에서 그 정도 불편은 감수할 수 있다. 원하는 장소에서 일할 수 있는 자유에는 필요하다면 시간에 상관없이 일할 책임도 따르는 게 당연하다.   


올해 2월에는 친형의 결혼식 때문에 약 한 달간 한국에 머물렀다. 2주는 휴가를 썼고 2주는 근무했다. 아무리 휴가일수에 제한이 없다지만 한 달씩이나 연속으로 놀 용기는 없었다. 주변 동료들을 봐도 한 달씩 쉬는 경우는 결혼 같은 큰 행사 때뿐이다. 아무튼 2주 휴가 중에는 서울과 대구 등을 돌아다니며 친구도 만나고 형 결혼식도 치르면서 보냈고, 나머지 2주는 강원도 춘천에서 (원격) 출근했다. 내 부모님이 강원도 춘천에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 내가 학창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한 강원도 산골 춘천에서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에 출근할 수 있는 세상이 올 줄 그 누가 상상했을까.


사실 나는 미국 MBA 학위도 상당 부분 춘천에서 이수했다. 미국 버지니아에서 학위 이수 중에 코로나 팬데믹이 터져버렸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모든 학교 활동이 정지되고 이내 원격화되었다. 어차피 집 밖에도 잘 나갈 수 없는 상황에 굳이 미국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여름방학 인턴과정이 끝나고 곧장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곧장 2학년 가을학기가 시작되는 바람에 나는 원룸에서 2주 동안 자가격리를 하며 홀로 외롭게 수업을 들어야 했다. 격리가 끝나자마자 곧장 춘천 부모님 집으로 옮겨 온라인으로 수업을 들었다. 미국 MBA 수업을 강원도 춘천, 그중에서도 깡시골인 신북읍 산속에서 이수하고 있는 상황이 비현실로 느껴졌다. 내 미국 유학이 갑자기 춘천 유학이 되다니. 아까운 내 등록금...


온라인 수업이라고 해도 강의를 한 번에 몰아서 주말에 듣는 꼼수는 통하지 않았다. 매일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수업에 Zoom으로 접속해 케이스 토론에 참여해야 했다. 때문에 나는 한국에서도 미국 시간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오후 4시에 자서 밤 12시에 일어나는 생활이 수개월간 이어졌다. 부모님, 아내, 딸아이와 한 지붕 아래 살지만 다른 시간을 살다 보니 겹치는 시간이 많지 않아 외롭기도 했고, 수면의 질이 떨어져 평소 머리가 맑지 않게 느껴지는 부작용도 있었다. 이때를 상기해보면 지금 내가 직장에서 누리는 시간적, 공간적 유연성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더더욱 실감한다.


세금과 비자 문제로 인해 한국 방문은 한 번에 최대 한 달이라는 제약이 있긴 하다. (이런 제약이 없다면 너도 나도 미국 회사에 취업해 미국 소득 수준의 달러를 벌면서 동남아에서 호화롭고 여유 있게 살고자 할 것이다.) 이 한 달이라는 것도 절대적인 것은 아닌데 회사 내 담당팀과 상의 후 부득이한 경우에는 좀 더 머무를 수도 있다고 들었다. 나는 지금 미국 영주권 신청 절차 중인데, 영주권이 발급된 이후에는 비자 문제가 없어서 한국과 미국을 왔다 갔다 하는 게 좀 더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때도 비행기 값이 아까워서 자주 왔다 갔다 하긴 어렵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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