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22개월쯤 되던 어느 날이었다. 대뜸 낮잠을 거르더니 저녁 즈음부터 보채기 시작했다. 그냥 낮잠을 못 자서 피곤한가 싶다가 아무래도 그 정도가 심한 것 같아 체온을 재봤다. 역시나. 37도 중후반 선에서 몸에 열기가 있었다. 이날부터 한 주간 지옥길이 열렸다. 아픈 아이도, 그걸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아내와 나도 심적으로 매우 고달픈 시간이었다. 이때까지 한 번도 아픈 적이 없던 아이라 더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다.
아이가 아픈 걸 알아차렸을 때 우리가 바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대충 이랬다.
1. 응급실(ER)로 달려간다.
2. 24시간 운영되는 병원 콜센터에 전화해 간호사와 상의한다.
3. 주치의에게 이메일을 보내 상황을 알리고 상의한다.
4. 대면진료를 예약하고 병원에 직접 방문해 진료받는다.
5. 전화진료를 예약하고 주치의에게 전화로 진료받는다.
6. 화상진료를 예약하다 주치의에게 화상으로 진료받는다.
7. 해열제를 먹이고 상황을 지켜본다.
우리는 일단 2번을 택했다. 아직 아이 상태가 심하지 않아 응급실로 달려갈 일은 아니었고, 하루 이틀 만에 열이 내리고 나을 수도 있기 때문에 좀 더 지켜보다가 진료를 봐도 괜찮겠다고 판단했다(워낙 건강한 아이라 처음엔 금방 나을 줄 알았다). 추가로 3번처럼 이메일로 아이의 상태를 자세히 적어 주치의에게 발송도 했지만, 마침 그날은 주치의의 휴진 날이었고 그다음 날은 주말이라 며칠이 지나고 나야 이메일을 확인할 터였다. 전화상담을 통해 간호사는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고 우리에게 주의할 점과 필요한 조치들을 알려줘 도움이 됐다.
만약 아이가 처음부터 증상이 심했다면 어땠을까? 응급실로 냉큼 달려갔을 것이다. 미국의 전반적인 의료비용은 비상식적으로 높은 걸로 유명하다. 따라서 아이를 응급실에 데려가서 진료를 보고 치료를 받게 됐을 때 어느 정도 비용이 나올 것인지 궁금한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결론적으로 의료보험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우리 가족이 당시 가입돼 있던 보험은 응급실 비용을 대부분 커버해줬다. 수술이나 기타 대대적인 추가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응급실 방문 비용은 회당 75불로 고정이었다. 나도 한 번 밖에서 탈수로 쓰러지는 바람에 응급실에 실려갔던 일이 있었는데 이 때도 내 부담은 딱 75달러였다.
우리 딸의 열은 나흘이 넘도록 나아지지 않았고, 매일매일 나는 의료진과 전화 또는 이메일을 통해 상황을 공유했다. 4일째 되는 날 주치의는 코로나 검사를 권유했고, 우리는 병원이 아닌 야외 코로나 검사소로 아이를 데려가 검사를 받게 했다. 천만다행으로 다음날 코로나 음성 판정이 나왔고, 주치의는 리나를 직접 보고 싶다며 대면 진료를 잡아줬다. 그렇게 아프기 시작한 지 5일 만에 주치의를 직접 만나 진료를 봤다.
다행히 육안으로 확인되는 문제는 없었고, 주치의는 소변검사와 혈액검사를 권했다. 여기서 "권했다"는 표현을 강조하고 싶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미국 의사들은 처방을 내릴 때 마음대로 하지 않고 꼭 환자인 우리 의사를 먼저 묻는다. 그리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끔 권하는 선에서 여지를 남긴다. 결국 모든 의료 결정권은 환자 본인과 보호자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소변검사하실게요"와 "소변검사해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괜찮으세요? 원하시면 며칠 더 상황을 보고 하셔도 되고요"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주치의는 아이가 소변검사와 혈액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해주었고, 우리는 언제든 lab이라 불리는 검사소에 방문해서 의료보험 카드만 보여주면 의사가 주문해놓은 각종 검사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아이가 병원 방문 자체를 너무 힘들어하고 그걸 보고 있는 우리도 너무 힘들어서 소변검사와 혈액검사를 한 번에 받지 않고 이틀에 나눠 받았다. 병원이 차로 10분여 거리라 귀찮을 것도 없었다.
검사 결과는 나오는 즉시 병원 시스템에 입력돼 의사도, 환자인 우리도 직접 홈페이지 또는 모바일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의사도 아닌 우리가 외계어 같은 영어 줄임말로 가득한 검사 결과를 본들 무슨 득이 있겠냐마는, 환자의 의료정보는 당연 본인의 것이므로 의사뿐 아니라 환자도 직접 조회하고 관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결과들이 저녁에 업데이트돼서 환자 보호자인 내가 우리 주치의보다 검사 결과를 먼저 확인했다.
다음날 늦게 결과를 확인한 주치의는 소변과 혈액에서도 딱히 우려되는 부분은 나오지 않았다고 내게 이메일을 보냈다. 나는 리나의 현재 상태에 대해 적어 답장을 보냈고, 주치의는 이틀 뒤에 전화 진료를 예약하길 추천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아이의 상태에 대해 궁금한 점이나 변화가 있으면 24시간 대기 간호사에게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다. 그렇게 오늘 낮에 주치의와 전화로 진료를 봤는데, 전화로 받는 진료는 평생 처음이라 재밌었다. 흥미롭게도 대면진료는 20달러의 자기 부담금이 있는 반면 전화와 화상진료를 부담금이 아예 없었다. 환자 입장에서 공짜 진료다. 결론적으로 지난 한 주 동안 아이를 돌보느라 우리가 지출한 비용은 20불이 전부였다. 수많은 통화와 이메일, 코로나 검사, 혈액과 소변검사 등이 모두 보험으로 100% 커버된 덕이다.
이후에도 우리 가족은 화상진료를 종종 활용하고 있다. 이제 단순히 약을 처방받기 위해서 병원에 가는 일은 없다. 원격으로 처방받고 직접 약국을 방문하기도 하고, 그것도 귀찮을 때는 약도 집에서 택배로 받아먹는다.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가 의료서비스를 받는 모습조차 이렇게 순식간에 바꾸어놓았다. 유연성. 나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일상을 딱 이 한 단어로 정의하고 싶다. '진료는 무조건 의사와 환자가 만나서 이뤄져야 한다'는 고정관념도 '일은 무조건 사무실에 나가서 하는 것'이란 생각처럼 빠르게 낡아가고 있다. 의사라고 재택근무하지 말라는 법 없다(있나?). 아무튼. 어디선가 누군가는 이미 하고 있다. 유연하게 생각하면 길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