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렵게 쓰인 쉬운 글

by 최혁재
커버이미지: Photo by rawpixel on Unsplash


<백수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쓰고 벌써 한 달이 지났다. 핑계를 대자면, 그동안 MBA 지원 에세이를 쓰느라 고생했다. 처음에 다른 사람들이 써놓은 MBA 에세이집을 보고 쉽게 생각했다. 저 정도면 나도 금방 쓰겠구나. 근데 이건 뭐, 전혀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얼마나 혼자 끙끙댔던지 브런치 글을 써야 할 에너지까지 MBA 에세이 작성이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지금은 일단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됐다.


MBA 지원 에세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정제하고, 작성하고, 수정하는 긴 과정에서 배운 점이 있다. 바로 '쉽게 쓰인 글은 쉽게 읽히지만, 쉽게 읽히는 글이라고 쉽게 쓰인 건 아니다'라는 것. 브런치 글을 쓸 때도 아이디어가 딱 떠올라서 내가 아는 지식의 범위 안에서 쭉쭉 순식간에 써 내려간 글은 술술 잘 읽힌다. 또 그런 글이 많은 공감을 받는다. 하지만 반대로 대단한 제목이나 주제를 정해놓고, 리서치를 하고, 글의 구성을 이리저리 바꾸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어렵게 쓰인 글'이 되고, 이런 글은 보통은 읽기 어렵다. 어렵게 쓰인 글이 쉽게 읽히도록 하는 게 작가 수준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하튼 난 아직 수준 낮은 작가니까, 결국 무조건 쉽게 쓰는 수밖에 없다.




지난주 서점 '베스트셀러' 가판에서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라는 책이 진열된 걸 봤다. 서울에서 백수로 살고 있는 나로서 당연히 손이갔다. 펼쳐서 작가 소개와 목차를 훑어봤다.


책소개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연암의 청년 시기와 요즘의 청년들을 서로 오버랩하며, 독자들에게 연암의 발자취로부터 배울 수 있는 행복한 백수의 삶을 일깨운다. ‘일, 관계, 여행, 공부’의 키워드로 청년의 삶을 구분한 뒤 연암이 어떤 방식으로 살았는지 따라가며 그의 당당한 자신감을 배우라 말한다.

논의를 전개하며 ‘백수’라는 단어를 새롭게 정의한다. 대체로 ‘백수’는 ‘쓸모없는’, ‘무가치한’의 의미와 더해져 부정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다. 먼저 이에 벗어나서 백수는 ‘자신의 삶을 보다 주도적으로 디자인하는 프리랜서’로 다시 정의하기를 제안한다. 그리고 읽고, 말하고, 쓰며 새로운 스토리를 창조하는 ‘크리에이터’가 될 것을 주문한다.

자신의 생애 리듬을 알고 스스로 삶의 과제를 조정하며, 세상을 자유로이 탐구하고 규칙적인 노동에서 벗어난 경제활동을 시도하라고 말한다. 화폐에 얽매인 삶을 살지 말고 관계가 바탕이 된 행복한 삶을 살라고 이야기한다.

출처: 알라딘


기본적인 책의 방향은 흥미로워 보였다. 결국 백수는 '실직자'가 아니라 자기주도적으로 경제/사회활동을 하는 프리랜서이고, 시대적인 트렌드가 점점 더 이런 삶을 지향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거다. 대단한 내용은 아니지만 작가도 자칭 '백수'고 나도 백수기 때문에 한번 읽어 봐야지 했다. 근데 목차를 따라 쭉 내려가다 보니 이런 내용이 있었다.


목차

...
4장 3. 알파고는 '딥' 러닝! 백수는 '덤' 러닝 - 백 권의 고전에 도전하라!
...

출처: 알라딘


고전 100권 읽으란 이 목차 때문에 급히 책을 내려놨다. 고전 자체를 폄하하고 싶지는 않지만, 고전 100권을 읽으면 인생이 바뀐다던가, 자기는 몇 년 동안 산속에 들어가서 1만 권의 책을 읽었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듣기 싫기 때문이다. 1만 권을 안 읽었으면 사기꾼이고 정말 읽었다면 책만 본 바보다. 그리고 책 읽기를 지나치게 예찬하고 '인생 바뀌는' 책 읽기 방법에 관한 책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사람들이 대체 세상에 어떤 가치를 더하고 있는지 지켜보면, 결국 또 다른 '책 읽기'에 대한 책을 몇 권 더 양산해낼 뿐이다. 이런 부가가치 없는 닫힌 순환고리는 다단계 느낌이라 정이 안 간다.


어쨌든 이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있는 걸 보니 백수란 키워드가 핫하긴 한가보다.




나도 평생 안 쓰던 글을 적기 시작하다 보니까 이제 어떤 글이나 책을 접하면 과연 이 글은 쉽게 쓰인 글인지 어렵게 쓰인 글인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쉽게 읽혀야 하는 건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쉽게 쓸 건지 어렵게 쓸 건지는 작가가 선택할 일이라고 본다. 쉽게 쓰인 글은 재미가 있고 어렵게 쓰인 글은 배울 게 많더라.


그래도 역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류는 어렵게(많은 경험, 리서치, 주장, 논증을 포함하는) 쓰인 읽기 쉬운 글이다. 이런 글은 많지 않다. 나도 지금은 쉽게 쓰인 쉬운 글 밖에 못쓰지만 언젠가는 어렵게 쓰인 쉬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 있길 희망한다. 갈 길은 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