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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는 무엇으로 사는가

by 최혁재

퇴사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시간 빠른 건 회사 다닐 때나 집에서 은둔할 때나 매 한 가지다. 결국 시간 없다는 건 핑계일 뿐, 앞으로도 내 삶에 시간이 넘쳐흐르는 경험은 없을 게 확실하다. 그래서 또 정신없이 산다.


지난 한 달간 아내와 함께 백수로 지내고 있는 나는 도대체 무엇으로 살았는지 한번 곱씹어 봤다:


#1. 요리하고 먹는 즐거움으로 산다

이게 가능한 건 100% 아내 덕분이다. 장모님 요리실력이 워낙 출중하셔서 아내에게 요리 재능이 있을 거란건 예상했었다. 근데 아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요리 재능이 발현되는 데 채 한 달이 안 걸릴 줄은 몰랐다. 애초에 회사에 다니면 안되는 집안일 능력자였나 보다. 그 덕에 한 달간 메뉴 중복 없이 매 끼니 다른 요리를 먹은 것 같다. 과연 언제까지 메뉴가 돌지 않고 새로운 음식을 먹을 수 있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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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아내가 해준 요리들. 내일은 뭐먹지?

아무래도 회사 다닐 때 매일 외식하면서 자극적인 음식을 먹다 보니, 집에 있어도 매 끼니 뭐 먹을지에 신경이 쓰인다. 아니 신경이 쓰인다기보다는 궁금하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하루 세 번 묻는다, "오늘 점심 뭐 먹어?", "오늘 저녁 뭐 먹어?, "내일은 뭐 먹어?". 이걸 매일 듣고도 아직 아내가 짜증내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무튼 지난 한 달간은 더워서 밖에도 잘 못 나가고 집에서 아내가 해준 갖가지 요리를 먹으면서 살았다. 나도 샐러드 피자 파스타 같은 서양요리는 아내에게 해주면서 힘을 보태고 있다. 같이 요리하고 먹는 즐거움으로 산거다. 하루하루가 비슷하고 특별한 자극이 없는 백수에게 그나마 매일 다른 음식을 먹는 낙은 필수가 아닌가 싶다.


#2. 오늘 하루를 버리지 않았다는 안도감으로 산다

아무 계획 없고 대책 없는 백수는 아니라서, 나름 매일 계획이 있다. 다른 글에서 다룬 적이 있지만, 하루 할 일들이 8~10개 블럭으로 정해저 있고, 아침마다 블럭 순서를 정해서 리스트를 만들고 하나하나 체크하면서 살고 있다. 안 그러면 너무 나태해질 것 같아서다. 예전부터 뭔가 내가 나태하게 지내는 느낌 자체가 너무 싫었다. 휴식이 필요할 때도 마냥 멍 때리고 있으면 죄책감이 드는 성격이라 어쩔 수 없나 보다. 이건 분명 우리 엄마에게서 받은 유전이다.


근데 뭐 사실 죄책감이 든다고 항상 성과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나태하게 빈둥댄 거보다 훨씬 더 기분 나쁜 상황은 이런 거다. 논다는 죄책감에 뭔가 일을 찾아서 하려고 했는데, 막상 쉬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라서 그 일도 대충하거나 못 끝내고 밤에 하루를 돌아보니 쉬지도 못했을 때다. 체크리스트가 없으면 이런 일이 또 반복될 거란 걸 안다. 그래서 백수 치고는 빡세게 나름 스스로 철저히 관리하려고 하는 편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내와 같이 집에 있다는 사실이다. 혼자 있었으면 분명히 지금보다 늘어졌을 거다. 그런데 신기하게 아내가 눈치 주는 것도 아닌데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그래도 가장인데 뭔가 안 하고 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나 보다. 그래서 아내가 집에 있을 때(거의 항상이긴 한데) 공부나 일에 집중이 잘 된다. 이렇게 오늘도 나는 Microsoft To-Do 앱을 노트북에 켜고 할 일 목록을 체크해가며 오늘도 나름 의미 있게 보냈다는 안도감으로 살고 있다. 물론 지금 브런치 글을 쓰는 것도 애초에 리스트에 있던 일이다. 체크.


#3. 돈 아꼈다는 사실에 궁상떨면서 소소한 재미로 산다

회사 다닐 때 돈 쓰는 재미로 살았다면 지금은 반대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바로 어제, 점심은 주먹밥 저녁은 파스타를 해 먹었는데 두 명이 두 끼 해결하는 데 1만 원이 안 든 거다. 밤에 아내와 산책을 하는 길에 그 얘기를 하면서 둘이서 너무 좋아했다. 그 상황을 자각하고 있으니 더 웃겼다. 원래는 한 끼에 3~4만 원도 커 보이지 않았는데 역시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다. 돈이 많으면 또 모르겠는데 없다면 아끼는 재미로 살아보자.


#4.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여 줬다는 뿌듯함과 근육통으로 산다

출퇴근이 없다 보니, 사실 요즘 같은 더운 날씨에 밖에 나갈 일이 없다. 그리고 하는 공부와 MBA 지원도 모두 앉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루 중 10시간 이상은 마냥 앉아있는다. 회사 다닐 때는 그래도 중간중간에 커피 마시러도 나가고 화장실도 가고 땡땡이치고 전화도 하곤 했는데, 이젠 카톡도 하루 두세 번 확인이 끝이고 전화기는 안 울린 지 오래다. 앉아서 공부하고 밥 먹고 집안일 좀 거드는 것 그뿐이다.


그래서 운동이 중요하다. 하루 한번 헬스장에 가서 아내와 서로 트레이너 역할을 해주면서 근육을 놀려주고 나면 다시 한번 앉아서 8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력이 살아난다. 그리고 근육통을 항상 가지고 있으면 그 자체가 내가 집에서 절어 지내는 한량은 아니라는 뿌듯함을 준다. 사실 이게 중요하다. Sound body, sound mind. 집에서 장기간 놀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운동은 정말 강추한다. 내가 원래 운동 싫어하는 사람이라 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운동은 싫은 만큼 더 해야 하고 안 할수록 더 싫어지는 특성이 있다. 싫어도 그냥 하면 잠도 더 잘 온다.


#5. 목표를 세우고 이뤄가는 추진력과 성취감으로 산다

퇴사 딱 2주 뒤에 미국 MBA 진학을 위한 첫 관문인 GMAT 시험이 잡혀 있었다. 백수로서 내 첫 목표는 한 번 만에 그 시험을 끝내는 거였다. 우선 거기에 시간을 더 쓰고 싶지도 않았지만, 한 번에 $250라는 돈도 한 푼 더 쓰고 싶지 않았다. 저거 아끼면 내 한 달 용돈 이상이 절약되는 거라 생각하니 더더욱 단칼에 끝내야 했다. 학원이나 인터넷 강의는 당연히 없었다. 그 돈이면 한 달 생활비 나올 거니까.


$100 쯤 주고 Official Guide 수험서와 모의고사를 4회분을 샀다. 그리고 시험을 1주일 앞두고는 거의 매일 실제 시험환경과 비슷하게 모의고사를 봤다. 점수가 다이내믹하게 650~750 사이에서 큰 폭으로 요동쳐서 조금은 불안했는데, 그래도 뒤로 갈수록 자신감이 생겼다. 다행히 내 첫 GMAT 시험 결과는 750점, 목표대로 한 번 만에 졸업했다. 백수라서 심적인 여유가 많았던 면도 있지만, 여기에 쓸 시간과 돈이 아깝다고 생각하고 집중한 게 주요했던 것 같다. 다음 목표는 우선 MBA 서류를 통과해서 인터뷰 요청을 받는 거고, 그다음은 TOEFL이다. 목표가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게 하고, 작은 성취가 삶에 생동감을 주는 것 같다.


퇴사 후 첫 달은 너무 즐거웠다. 스트레스도 없었고 나름 성과도 있었다. 다음 한 달도 요리하고 먹고 절약하고 계획을 실천하고 운동하고 학습하고 목표를 이뤄가면서 묵묵히 하루하루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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