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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혁재 Jul 28. 2019

난 왜 금융이 싫어졌을까?

MBA 프로그램 시작을 3주 앞두고, 리쿠르팅을 서서히 준비하고 있다. 1) 우선 Ringle을 통해서 주 1회씩 개인 영어 튜터링을 받고 있고, 2) 'My story'라고 해서 15초, 30초, 또는 2분 안에 리크루터들에게 자기소개를 임팩트 있게 할 수 있도록 스크립트를 가다듬고 있다. 3) 사실 레주메도 빨리 고쳐서 학교 커리어 센터의 피드백을 빨리 받으면 좋은데, Data Science 여름학기 스케줄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아직은 손을 놓고 있다.


'My story'를 가다듬으면서 한 가지 발목 잡힌 부분이 있는데, 바로 왜 금융을 떠나 다른 업종에 일하고 싶어 졌나 하는 부분이다. 아직 100% 확신은 없지만, 우선은 컨설팅을 1순위로 두고 MBA 리크루팅에 임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애초에는 컨설팅은 관심 밖이었는데, Bain & Company 서울 오피스가 진행했던 MBA 브런치 및 설명회에서 너무 좋은 인상을 받아 컨설팅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두 친절하고 유머러스할 뿐 아니라 뭔가 스마트함이 확 느껴졌다. 이런 동료들과 일하면 재밌겠다 라는 생각이 자연히 들었다.


아무튼 컨설팅이 하고 싶다고 자기소개를 하는 건 좋은데, 정확히 왜 난 금융을 떠나고 싶어 진 걸까? 이제껏 내가 구체적으로 왜 금융이 싫어졌는지 정말 깊이 파고 들어가 보지 않았나 보다. 처음에 증권사에서 RA로 시작해서 외환 애널리스트가 되기까지 사실 난 정말 금융을 사랑했었다. 너무 재밌었고, 내가 하는 일이 주는 intellectual challenge를 해결해 나가는 게 설렜다. 돈을 버는 것과 일이 별개의 일이 아니게 느껴져서 행복했고, 그렇게 몇 년 경력을 쌓고 나면 돈을 다루는 능력도 늘어서 개인 투자로 큰돈도 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재밌고 사랑했던 금융에 정이 뚝 떨어졌다. 계기는 증권사에서 자산운용사로 이직하면서 찾아왔다. 사실 스카웃 형태의 이직이라 연봉도 오르고 진급도 하는 좋은 이직이었다. 업무시간도 절반으로 줄었고, 말로만 듣던 work-life balance를 보장받았다. 회사 건물도 훨씬 fancy 해졌고, 업계 내 위치도 을에서 갑으로 올라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난 왜 그렇게 급히 금융업계를 떠나고 싶어 진 걸까? 정말 금융 자체가 싫어진 걸까, 아니면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나 새 회사의 부조리에 질렸던 걸까? 생각나는걸 한번 다 나열해보자:


- 더 이상 내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 열심히 일하거나 특별한 성과를 내는 게 인정받는 회사 분위기가 아니었고, 그게 싫었다

- 내가 존중하고 본받고 싶은 상사가 별로 없었다

- 그룹 회장이 대놓고 주주들 돈 빼먹으려는 술수를 부리는 게 역겨웠다

- 하루하루 내가 어떤 식으로든 더 이상 발전하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 뭣도 모르는 사람들, 똑똑하지 않은 사람들 아래서 일하는 게 싫었다

- 사내 정치, 위선, 이간질 다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 주식, 환율, 금리가 하루하루 변하는 걸 가지고 호들갑 떠는 일에 질렸다

- 금융자산들의 무작위성을 자기가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무지에 놀랐다

- 출근을 하면 할수록 내가 바보가 돼가고 있었다

- 이직은 옵션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회사들도 다 거기서 거기니까(지금 이 회사에 있는 사람들도 다 다른 회사에서 온 거고, 다른 회사에도 이 회사 출신 사람들이 많이 가 있고, 결국 국내 금융권은 다 한솥밥이다)

- 내가 Big Short 영화 주인공들처럼 금융업 쪽에서 큰 혜안을 가진 게 아닌 게 확실해졌다

- 금융에서 돈을 많이 벌려면 영업을 해야 되는데 이건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 국내 금융업은 아직도 문과 중심으로 돌아가는 주먹구구식 금융이다. 숫자 가지고 노는 업종인데, 수학 싫어서 문과 간 사람들이 이끌고 있다. 데이터 보단 감으로 거의 찍는다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적었는데, 적고 보니 내가 싫어진 게 금융 자체는 아니란 생각이 든다. 금융이라는 현대 자본사회에 꼭 필요한 function/operation이 싫어진 게 아니라, 내가 속해 있던 회사와 국내 금융업 수준에 많이 실망했던 것 같다. 그러면 미국이나 홍콩/싱가폴 금융업계에서 일하는 건 고려해 볼만하지 않냐고? 금융업 자체가 싫어진 건 아니라고 하더라도, 처음만큼 엄청 재밌게 느껴지진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우선은 다른 옵션들을 미국에서 경험해 보고 싶다. 컨설팅 가서도 또 엄청 질리거나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해보지 않으면 질리거나 실망해볼 기회도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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