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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혁재 Dec 30. 2019

나이가 뭐라고

커버 이미지: Photo by Glenn Carstens-Peters on Unsplash


한국 사람들과 달리 미국 사람들은 나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이 문화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니까 중국은 한국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중국 친구에게 물어보니 한국처럼 한 두 살 차이를 구분하고 그러진 않는단다. 자기 친구들도 다 나이가 다르다고 한다. 한국처럼 극단적으로 나이가 중요한 나라는 없나 보다. 12월 31일과 1월 1일에 태어난 두 아기가 다른 나이라는 이름의 계급장을 달고 '친구'가 될 수 없는 시스템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시스템일까? 왜 친구가 아니라 '아는 형/누나/동생' 또는 '친한 형/누나/동생'이라는 프레임을 씌울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 놨을까. 사실 그 이유가 궁금하기보다, 그냥 이제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


한국에서 나이가 관계의 걸림돌이란 걸 처음 인식한 건 고등학생 때였다. 신촌에 있는 Wall Street Institute라는 영어회화 학원에 방학 때 잠깐 다녔었다. 그곳에서는 영어만 써야 했다. 라운지에 앉아 있으면 프리토킹을 하고 싶은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하루는 5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아저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됐는데, 알고 보니 이 분은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하시는 의사였다. 해외 연수를 나가기 전에 영어 실력을 좀 키우고 싶어 진료가 끝나고 학원으로 오신단다. 듣고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까지 살면서 50대 의사 아저씨와 어떤 목적 없이 이렇게 자기소개를 하며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해 본 적이 있었나? 당연히 없었다. 그때 생각했다. '아, 영어로 대화하면 50대와도 친구가 될 수 있구나.' 하지만 저 학원 문을 나가는 순간, 대화가 영어에서 한국말로 바뀌는 순간, 더 이상 우리는 친구일 수 없음을 느꼈다. 언어와 나이가 규정하는 관계의 힘을 몸소 체험한 거다.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MBA 프로그램의 학생 평균 나이는 만 28세다. 정확한 편차는 모르겠지만 꽤 큰 것은 확실해서, 내가 아는 가장 어린 친구가 23살이고 가장 나이 많은 친구는 35살 정도 되는 것 같다. 그렇다. 미국도 대강 서로 나이를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예 아무 의미 없는 숫자는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나이를 서로 안다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뭐, 얘네도 세대차이 같은 건 어느 정도 있겠지만 어차피 미국 사람들은 노는 방법이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에 별 문제 없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파티를 하면 한 손에 맥주를 한 병씩 들고 이곳저곳을 누비면서 대화를 나누거나 술 게임을 한다. 술 게임이라고 해봤자 탁구공 던저서 컵에 집어넣는 게임이나 손으로 컵 뒤집기 같은 말도 안 되는 1차원 적인 놀이들이다. 장점이라면 시대를 아우를 수 있다는 점인데, 생각해보니 한국 술 게임들은 워낙 다양하고 트렌드가 있어서 확실히 나이 차이가 나면 같이하기 어려울 것 같다. 뭐 전혀 의도된 것 같지는 않지만 아무튼 이런 미국의 단순한 놀이문화도 나이를 덜 중요하게 만드는 요소는 아닐까.


이제 누가 나한테 나이를 물어보면 대답할 때 확신이 없다. 나이 생각 자체를 할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정말 생각이 잘 안 나고 헷갈린다. '30살이요'하고 나서도 이게 맞는지 다시 고민해보곤 한다. 뭐 어차피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생각할수록 세월이 야속할 뿐이지. 문화라는 게 의도한다고 쉽게 바뀔 수도 없는 거지만, 한국도 나이라는 정말 사소한 요소 하나가 가지는 무게감이 줄어드는 쪽으로 바뀌어가면 좋겠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 많은 사회에서 나이 스트레스라도 좀 줄었으면 좋겠고, 한두 살 나이로 편 가르지 않고 넓은 인연들을 많이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친한 형/누나/동생'이란 말 대신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나이가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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