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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혁재 Dec 29. 2019

나도 좀 폐인이고 싶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Glenn Carstens-Peters on Unsplash


'나는 무엇을 할 때 가장 즐거운가?' 하는 질문이 요즘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돈다. 누군가에겐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이 쉬운 질문에 대해 나는 몇 날 며칠 고민 중이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할 때 가장 즐거운 걸까. '가장'이란 말을 앞에 붙어 있으면 더 어려운 거 같아 일단 그저 조금이라도 좋을 일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다. 뭐 그렇다고 크게 쉬워지진 않았다는 게 문제긴 하다.


미국에서 사람들이 참 많이 하는 질문 중 하나가 'What are you passionate about?'이다. 결국 무엇을 하는 게 즐거운지 하는 질문과 거의 같은 맥락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자기가 하면서 즐거운 일에 대해서 열정도 있을 테니까. 결국 이 질문에 대한 답도 나는 쉽사리 할 수가 없다. 그냥 억지로 짜내서 기껏 한다는 대답은 '재밌는 걸 새로 배우는 걸 좋아한다'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 '재밌는 게' 뭔지는 또다시 물음표다. 아직도 난 탐색 중이다.


내 친 형은 즐거운 일이 참 분명한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형을 보며 많이 했던 생각이 '뭐가 저렇게 좋지?' 하는 거였다. 우선 형은 어려서부터 컴퓨터 게임을 사랑했다. 수 없이 많은 시간을 쏟아부은 건 말할 필요도 없고, 조조전이라는 게임을 마스터 한 뒤에는 직접 스토리 라인을 짜고 포토샵으로 캐릭터를 그려 게임을 확장시키기도 했다. 삼국지도 사랑하고 게임도 사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 사람들이 흔히 말하던 '사람 폐인 만드는 3대 게임'이란 게 있었다. 롤(League of Legends), 문명(Civilization), FM(Football Manager)이 그들이다. 한 번은 방항 때 형 자취방에 들렀는 데 마침 형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 요즘은 무슨 게임을 하나 한번 모니터를 봤더니 놀랍게도 형은 이 3대 폐인 게임을 모두 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FM에서 경기를 돌려놓고 롤은 게임 중계를 보면서 문명을 play 하고 있었다. 잦은 Alt + Tab을 하면서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매일 게임하는 형을 봐온 나로서도 너무 놀라운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다. 충격이었으니까. '아 우리 형이 이렇게 폐인이었다니'하는 생각은 아니었고, 오히려 '와, 나도 저렇게 까지 열정적으로 게임이나 그 무엇을 해본 적이 있나?' 하는 생각 때문에 충격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살면서 한 번도 형이 게임을 사랑하듯이 어떤 일을 사랑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형은 폐인 아니고 의사다. 나는 의사는 됐고, 좀 폐인이 되고 싶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내가 어떤 일을 형처럼 즐기고 사랑하지 못하는 건 내 100%를 쏟기 않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나는 TV나 영화를 보면서도 100% 집중을 잘 못한다. 딴생각이 많고 특히 숙제나 다른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TV를 보면서 죄책감을 느낀다. 증상은 다리를 떠는 거다. 어렸을 때 밖에서 뛰어놀면서도 옷이 더러워지는 걸 신경 쓰고 있어서 100% 몸을 던지며 놀지 않았던 것 같다. 컴퓨터 게임을 할 때는 항상 형이 쉬는 시간에만 해야 했고, 형이 비키라고 하면 비켜야 했기 때문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생각이 많고 몸을 아끼면서 바깥세상을 완전히 차단, 무시하고 즐기려고 하지 않게 때문에 즐겨지지 않은 건 아니었을까.


TV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은 미국 드라마 Suits다. 시즌 9까지 나와있는 드라마를 나는 모든 에피소드에 걸쳐 3회를 돌려봤다. 본 걸 반복해서 보는 건 별로 내 스타일은 아닌데, 세 번이나 돌려봤다는 건 내가 정말 정말 즐겼다는 소리다.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Suits의 주인공 Mike는 사진기억력을 가진 가짜 변호사다. 젊을 때 친구를 잘 못 만나 방황하다 대학교에서 퇴학을 당했고, 좋은 머리를 이용해 다른 사람들의 변호사 시험을 대신 봐주다 우연히 대형 로펌의 위장 변호가사 된다는 스토리다.



나는 Mike가 비상한 머리를 이용해서 불가능할 것 같은 문제를 풀고 돈 밖에 모르는 불의한 기업인들에게 정의를 선사하는 장면에서 가슴이 뛴다. 결국 내가 Suit 보는 걸 그토록 즐긴 이유는 '말도 안 되게 뛰어난 전문가 정신과 정의'다. 여기서 정의란 거창한 게 아니고 그저 세상을 더 상식적인 곳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 일이다. 나도 장인의 경지에 오른 전문성으로 세상을 더 상식이 통하는 곳으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는 일에 열정이 있기 때문에 Suit를 보면서 대리만족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게 결론이다. 나는 배움을 통해서 전문성을 향해 나아가고, 궁극적으로 그 전문성으로 남에게 영향을 끼치고 싶나 보다. 아무튼 Suits는 내가 보는 사람들에게 마다 강추한다. '무조건 보세요' 하면서. 흠, 이 정도면 나도 Suits 폐인일까?


우리 형 같은 누구에겐 자기가 왜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 깊이 파보는 게 의미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게 분명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누가 물어보면 바로 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다 말할 필요도 없다 매일 행동으로 말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나처럼 이런 질문이 어려운 사람들도 많이 있을 거라도 감히 짐작해본다. 우리는 깊이 고민해야만 그나마 실마리라도 찾아갈 수 있다. 번거롭고 귀찮은 일일지도 모르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너무 뻔하고 당연하면 재미없으니까. 이렇게 집요하게 생각하고 찾기 위해 노력해서 찾은 내 인생의 즐거움은 쉽게 얻어진 어떤 이들의 즐거움보다 더 큰 즐거움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도 언젠가는 좀 폐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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