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봐라, 내가 뭐랬냐. 는 말은 참 어느모로 봐도 추잡하다.
현재 문제를 벗어날 방법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 과거의 선택에 대한 질책을 배경으로 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통해서는 고칠 것도, 나아질 것도 없다. 그래서 참 추잡하다.
그런데, 살다보면 이렇게 말하고 싶은 순간이 너무나 많다. 본성이 군자/선비 보다 한량/광대에 가까워서 그런 것 같다. 해서, 참고 참다가, 오늘 한 번만 대놓고 추잡해져 보기로 했다.
몇 년 전, 나는 국내 모 OTT서비스에 대한 UX 제안을 했고, 보기좋게 떨어졌다.
제안의 자세한 항목은 건너뛰고 큰 내용만 짚어보자면, 이대로 가면 몇 년 안남았다고, 비용들여 개인화 하시고, 한 편 컨텐츠에 투자 하시는 수 밖에 없다는 골자의 제안이었다.
딱 예상했던 반응을 들었는데. 돈 없다. 우리 지금 상승세다. 잘나간다. 너희를 뭘 믿고. 뭐 대충 그런거였다.
그리고 오늘 KT와 넷플릭스 제휴에 대해 국내 업체들이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거봐라. 내가 뭐랬냐. 몇 년 안남았다고 했냐 안했냐.
더 몇 년 전에는, 아티스트와 팬들이 라이브 동영상으로 서로 소통하는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을 한 일도 있다. 어떤 연예인이 자기 시간 써 가면서 그걸 쓰고 있겠냐고, 거기 들어갈 비용이 얼마일 것 같냐고, 수많은 비난과 악플이 달릴게 뻔한데 관리가 되겠냐고, 수억가지 안되는 이유로 '뭘 잘 모르는'아이디어 취급을 받았더랬다. V라이브가 성공하는걸 보면서 속으로 수십번은 말했다. 거 봐라. 내가 뭐랬냐.
사람들이 컨텐츠를 가지고 놀면서 생기는 밈 중에 가장 편하고 쉬운건 릴레이라고, 주제를 던져주면 릴레이로 놀 수 있는 동영상 서비스가 가능 할 것 같다고, 모 회사에 제안했던 적도 있다. 비용이 얼마인줄 아냐고. 개발이 얼마나 걸릴지 상상이나 가냐고. 그걸 누가 하냐고 '답답한' 아이디어 취급을 받았다. 틱톡 챌린지들을 보고 속으로 수백번쯤 중얼거렸다. 거 봐라. 내가 뭐랬냐.
누군가가 똑똑해서가 아니고, 아무나 뻔하게 예측 가능한 일들이 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좀 고약해서, 어마어마한 비용이 지속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자동차 업계는 전기차로, 모바일 제품은 개인화로, 비대면은 확대되고, 모든 분야의 사업에서 컨텐츠가 중요해진다. 꼭 어마어마한 비전을 가지지 않아도, 몇 년 전 부터 모두가 알고 있던 일이다.
그리고 오늘,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떨어진 것 처럼 호들갑을 떨고있는 곳들은 모두, 지겹도록 이런 트렌드의 전환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고, 그 때 마다 [현재 상승 중]인 그래프를 들이밀며 "뭘 근거로?"라고 퉁명스레 대응하던 곳 들이다.
거의 매 년, 매 분기 트렌드 리포트를 쓴다. 요구하는 곳 들이 있기 때문에.
2009년에도 IoT와 초 개인화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지금도 있다.
그리고 아마, 수많은 컨설턴시의 직원들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것이다.
거 봐라, 내가 뭐랬냐.
내 마음에 안들고, 내가 납득이 안가더라도, 그 자체로 검토될 수 있어야 조언이다.
딱 내 마음에 쏙 드는 이야기는, 내가 해도 되는 이야기이고, 조언이 될 수 없다.
스스로 너무나 똑똑한 사람들이, 본인을 기준으로 뭔가를 판단하고 평가하는데,
오늘 하루 추잡해지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거 봐라, 내가 뭐랬냐. 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