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UX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UX 디자인이라는 용어가 시장에서 먹히게 된건 2000년대 초반부터 중반 사이였다.
그래서 그게 뭐라고? 라는 질문에 대해 길고 너절하게 답을 해야 하는 환경이었다.
아이폰이 갤럭시보다 뭐가 그리 좋다고 난리들인가. 에 대해 'UX가 훌륭합니다' 라고 말하면 먹히던 순진한 시절이었던것도 같다.
그리고 그 용어는 다른 모든 용어들 처럼 유행어의 범주에 들어가며 본래의 의미가 훼손되기 시작했다. 사용자가 아닌 고객경험을 본다는 CX, 브랜드 경험을 본다는 BX, 인간의 경험을 본다는 HX... X가 붙는 단어들이 마구 만들어졌다. 그 중 어느 하나도 업무 프로세스상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리서치를 통해 인사이트를 발굴해 해결해야 할 근본이 되는 질문을 찾아내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ideation해서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iterate하는 큰 틀안에서 모든 업무가 이루어진다.
문득 궁금했다. 대체 왜 다른 용어들을 만들어서 일하는 사람을, 배우려는 사람을, 관심있는 사람을 분산시키고 헷갈리게 만드는걸까. GUI Design의 대체어로 쓰이게 되어버린 UX라는 용어에 원래 의미를 찾아주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그래서 한 번 해보려고 했다. UX 디자인이라는 이름에 다른걸 붙이지 않고, 진짜 UX를 디자인 하는 일을.
되도않는 컨설턴시 직원이라는 놈이 대뜸 와서 '너거 대빵이 참석하는 워크샵을 준비해달라, 그래야 프로젝트가 성공한다'으름짱 놓을때 황당해하던 고객사 담당자의 표정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보고용 문서 대신 써주러 들어온거 아니라는 핑계로 벤치마킹 문서 하나를 정리해 주지 않겠다고 버텨 회의실에서 한 시간 넘게 싸운적도 있다. 도제식 교육을 넘어 성장에 대한 욕심있는 전문가들 집단이 되고자 자율을 부여하고, 그 시간이 성장에 쓰이지 않는걸 보며 혼자 술마시던 기억도 있다.
가장 중요한 과정이니 과도한 업무도 이해하라고 말하면서, 전체 프로젝트의 1/10도 안되는 예산만 배정되는 프로젝트들도 많았다. 미래를 대비하고 싶지만, 당장 적용 가능한 UI개선을 버릴수 없다고 말하며 전략과 산출물이 따로 놀게 되는 프로젝트도 많았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구성원들이 떠났다. 같이 꿈을 꿨던 구성원들이, 어느새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것을 보았다. 돌이켜본 나는, 프로젝트를 무사히 끝내는걸 목표로 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가 하고싶었던건 그런게 아니었는데. 그래서 나는 업계를 떠났다. 거창한 꿈 같은거 버리고, 내 제품 하나에 신경쓰는게 정신건강에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정신에 여유가 생기고, 처음 이 일을 하고싶었던 이유를 다시 생각해 봤다.
총체적 경험의 개선이 필요한 분야는 많다. 지금은 UX가 마치 디지털 제품에만 통용되는 단어처럼 받아들여지지만, 노먼 아저씨가 UX개선의 예로 드는건 주로 물성이 있는 제품들이다.
예를 들어보자.
저출산이 굉장한 문제라고 한다. 국가단위의 조용한 자살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가장 많이 꼽히는 것은 금전적 지원이다. 될까? 경험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 할 수는 없는걸까?
이데올로기가 희미해진 세상에 진영 대립은 극한을 향해 간다는건 매우 웃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걸 해결하려는 시도가 없다. 경험 관점에서 이런 문제를 해결 할 수는 없을까?
신과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높은 계급이었던 시대를 지나, 군대를 가진 사람이 지배계층이었던 시절을 넘어선 지금, 사람들은 돈이 많은 사람을 높은 계급으로 생각한다. 사상적인 이런 문제에는 경험 관점의 해결책이 도움을 주지 못하는걸까?
인구가 줄어들며 낙후된 도시는 과연 생명을 잃고 사라져가는 것 이외의 대안을 만들지 못하는걸까? 도시공학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경험적인 측면에서 도시를 바라보면 어떨까.
이런 일들을 하고 싶었다.
사람의 경험을 개선하는 일. 외국에서는 이미 하고있는 회사도 있는 그런 일.
내 뇌는 어지간한 노력 없이 더 좋아질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아마 가지고 있는걸 얼마나 잘 유지하는지에 대해서도 큰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처음 이 일이 좋았던 이유 자체를 잊어버리기 전에. 한번 해 보자고 결심했다.
작게. 진정성있게. 조금씩. 그리고 무엇보다, 즐겁게.
그래서 다시 시작한다. 다시 공부하고, 다시 고민하고, 다시 깨지려고 한다.
일론 머스크는 화성에 사람을 살게 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 비용을 지구에 쓰면 좋을텐데. 자기장도 거의 없는 별에 사람이 살 환경을 갖추는 것 보다, 모래폭풍 다음에 보이는 푸른 일몰에 감탄하는 것 보다,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어지러워진 지구의 환경을 바꾸는게 더 보람있을텐데. 더 쉽게 실현할 수 있을텐데. 그래도 그는 한다. 하고 싶으니까.
내가 가진건 그렇게 거창하거나 대단한 꿈도 아니다. 정말 소박하다. 그냥 잘나가지 않더라도, 진정성을 잃지 않고, 깨질걸 알면서도 하고싶었던 일에 도전하면서 입에 풀칠 하겠다는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시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한다. 다시.